부활한 '황진이' 하지원의 브라운관 파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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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수목드라마 ‘황진이’가 첫 방송부터 시청률 20%를 넘기며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황진이’ 역을 맡은 하지원은 그녀만의 독특한 요염함으로 조선시대 황진이를 생생하게 되살리고 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학창 시절 한번쯤 읊어봤음직한 시조의 한 구절이다. 지은이 황진이. 그때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조선 시대 최고의 명기라는 그녀는 어떤 모습의 여인일까? KBS 2TV 수목드라마 ‘황진이’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 흐릿하게 맴돌던 한 여인의 형상이 눈앞에서 또렷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요염하면서도 한없이 순정적인 눈빛, 품에 폭 안길 것 같은 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린 듯 강렬한 카리스마. 정반합의 오묘한 매력으로 시청자를 끌어당기는 하지원의 모습에서 어렵지 않게 황진이를 그려볼 수 있다. 비록 술을 따르고 남성들의 흥을 돋우는 기녀였지만 황진이는 당대의 시인이자 음악가, 예술가이자 춤꾼으로 재색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황진이가 지금 태어났다면 연기를 했을 거예요. 연회가 열리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도 춰야 하고, 멋진 거문고 연주로 사람들 가슴을 철렁하게 하기도 했대요. 다양한 재능을 가진 엔터테이너였던 거죠. 그런 사람이 이 시대에 태어났으면 그 끼로 분명 연예인이 됐을 거예요.”

황진이가 지금 태어나 연예인이 됐다면 하지원이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과연 황진이를 능가할 자유인이 됐을까? 하지원은 악바리 같은 근성과 참을성이 닮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둘 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어머니가 예전에 점을 봤는데 남자 사주라고 그러더래요. 남자로 태어났으면 더 잘 풀렸을 거라고요. 황진이도 그 당시 남자로 태어났으면 더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 같아요. 황진이는 절세미인인데다 현대에 태어나도 절대 뒤지지 않을 만큼 멋진 카리스마를 가진 훌륭한 사람이에요. 웬만한 사람들은 넘보지 못할 지적인 인물이기도 하고요. 어디 한구석 빠지는 데가 없잖아요.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일 했을 거예요. 연기를 하면서 제가 맡은 드라마 속 인물에 질투를 느끼기는 처음이에요(웃음).”

누구나 황진이를 떠올리면 남자들의 정신을 쏙 빼놓을 만한 요염한 기생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하지원도 캐스팅되기 전에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유명했던 기생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 처음에 황진이 출연 제의를 받고 머뭇거렸던 것도 이와 같은 선입견 때문이었다.

황진이는 자유인이자 종합 예술인, 드라마 속 인물에 질투 느끼기는 처음

“드라마 출연을 놓고 솔직히 고민을 많이 했죠. 더 좋은 작품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시놉시스를 보고 출연을 결정했어요. 황진이가 기생이라는 쉬운 여자로 그려진 게 아니었거든요.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황진이는 자유인이자 종합 예술인이더라고요(웃음). 벽계수, 서경덕 등 당대의 여러 남성들과 연애하는 이미지로 고정된 황진이를 감독님이 멋지게 표현해 주시리라 믿어요.”

드라마 ‘황진이’는 제작 전부터 과연 누가 타이틀롤을 맡을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영애, 김태희, 전지현 등 국내 톱스타들이 물망에 오르내렸다. ‘황진이’는 ‘장희빈’과 함께 여자 연기자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매력적인 배역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제작진은 하지원을 주인공으로 최종 낙점했다. 여성적인 매력과 다양한 재능은 물론 섬세한 내면 연기까지 다양하게 펼칠 수 있는 배우로 하지원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 캐스팅 이유다.

하지원은 그간 다양한 연기와 변화 가능성을 보여준 ‘끼’ 있는 배우다. 영화 ‘내사랑 싸가지’에선 푼수지만 사랑스러운 발랄함을 보여주었고, 영화 ‘색즉시공’에서는 여성적인 매력과 순수함을 한꺼번에 펼쳐 보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하지원의 연기가 빛을 발한 것은 드라마 ‘다모’와 ‘발리에서 생긴 일’이었다. 두 드라마에 잇따라 출연하며 ‘폐인’ 신드롬을 일으킨 하지원은 보는 이를 빠져들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저는 제가 섹시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그동안은 오히려 남성스럽고 터프한 이미지를 보여줬잖아요.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에서는 모두 20분 안에 헤어와 메이크업을 다 할 수 있는 캐릭터였거든요. 이번처럼 여성스럽고 요염한 캐릭터는 처음이라 잘 하고 있는지 의문스럽고 조심스러워요. 솔직히 마음도 무겁고요. 하지만 많은 분들이 황진이와 잘 어울린다고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죠.”

솔직히 하지원의 섹시함은 아찔함보다는 귀여움에 가깝다. 고풍스럽고 은은한 스타일이기보다는 발랄하고 톡톡 튀는 상큼한 아가씨 이미지이다. 하지만 화려한 한복을 입고 가채를 올리고 나타난 하지원은 요염하고 야릇한 매력을 물씬 풍겼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기녀 황진이로 분하기 위해 거문고는 물론 검무, 학춤, 줄타기 등 오랜 기간 가무와 기예를 연마하기도 했다.

검무·거문고·줄타기 등 30가지 넘는 전통예술 밤새 연습

“촬영이 없는 날에는 무조건 연습을 해요. 집에 악기를 갖다놓고 연주도 하고, 검무 추는 칼을 들고 춤 연습도 해요. 시간이 없으면 잠자기 전에 한 번이라도 만져보려고 하죠. 줄타기를 익히려고 집 앞마당에 ‘장비’를 설치해놓고 줄 타는 연습도 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배운 것 중 가장 어려운 건 역시 춤인 것 같아요. 한국 무용은 팔이 아닌 가슴으로 추는 춤이래요. 역동적인 동작도 절제하면서 가슴으로 느끼며 호흡해야 해요. 그래서 춤 동작도 문제지만 춤을 출 때의 표정과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죠. 하지만 그걸 표현해 내기가 결코 쉽지 않네요.”

30년 면벽 수도한 선사를 파계시킬 만한 매력은 단순히 화려하고 요염한 자태만이 아니다. 타고난 외모에 상대의 마음을 쥐락펴락 애간장을 녹일 수 있는 내적 카리스마와 정신적인 성숙함을 갖춰야 한다. 그녀가 연기를 통해 험난한 기녀의 삶을 체험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거꾸로 세워서 발만 묶고 춤을 추게 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는 촬영장이 눈물바다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기는 하지만 촬영하면서 예쁜 옷을 많이 입어볼 수 있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에요. 저도 이렇게 화려한 옷은 처음 입어 봐요. 그리고 한복이 잘만 입으면 정말 섹시하게 보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의상이나 액세서리가 너무 예뻐서 제가 일일이 다 체크하면서 챙기고 있어요. 예쁜 옷을 입으니까 표정도 더 잘 나오고 연기도 잘 되는 것 같아요.”

하지원이 이 드라마를 찍으면서 필연적으로 비교될 수밖에 없는 배우가 있다. 지금 한창 촬영 중에 있는 영화 ‘황진이’의 주인공 송혜교다. 드라마와 영화는 전혀 다른 분위기라며 두 사람을 경쟁적으로 비교하는 걸 꺼려하지만 하지원은 분명 상대를 염두에 두고 있다.

“사실 황진이가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어서 주춤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분 못지않게 멋진 모습 보여드리고 싶어서 욕심내서 촬영하고 있어요. 사실 드라마에서 황진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만드는 게 아니라 역사적 인물인 황진이를 제대로 보여주는 데 의의가 있어요. 하지원이 황진이인 척 몸으로만 연기하는 게 아니라, 황진이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습득해서 제대로 표현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황진이’ 포스터가 나왔을 때 저희 아빠도 저인 줄 모르셨대요. 사진 한 장이라도 하지원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들을 때가 좋아요.”

김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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