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권경쟁에 「큰 정치」 없다/정치권 불신… 긴급진단과 처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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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물가 등 민생외면… 염증만 심화/난국 극복책도 정략적 대안 뿐
정치권이 불신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정치 파행이 장기화되면서 정치외면,정치인에 대한 거부감이 국민들 사이에 일반적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정치권은 여기에 속수무책이다.
정치불신을 계량화해 보면 실감난다. 본지 25주년 기념 여론조사는 시국불안의 가장 큰 원인을 정치권의 정치력 부족탓으로 돌리고 있고 호감가는 정당이 없다는 답변이 64%였다. 국민 3명중 2명꼴로 지지정당이 없다는 것은 현 정치권에 대한 기대포기를 의미한다.
민자당이 매월 하고 있는 여론조사도 거의 마찬가지로 알려져 있다. 각 당의 지지율은 모두 20% 미만이며 정당지지를 포기한 숫자가 항상 50%를 넘고 있다. 국민 절반은 그들을 대표하는 정당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민자당 자체 여론조사에서 특이한 것은 국회의원에 대한 출신지역구민들의 만족도. 이 만족도가 30%되는 의원은 손을 꼽을 정도고 서울의 경우 10∼20% 정도면 괜찮은 수치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의원들이 자기 지역구민의 극소수로부터만 지지받고 있는 「정치의 유리」 현장이 빚어지고 있는 셈이다.
또 여야 양 김씨의 정계퇴진 목소리는 국민속에 넓게 자리잡아가고 있고,이를 정치권도 인정하고 있으며 민자당 여론조사도 「60% 강」으로 집계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이 최근 민자당 의원들에게 『이대로 가다가는 다음 14대 총선에서 모두 국민들로부터 불신을 받을지 모른다』고 경고한 것은 여야 모두에 대한 정치불신의 심각성이 청와대에서도 감지되고 있음을 확인해 주는 대목이다.
남재희 의원(민자)은 『14대 총선에서 정치권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이변이 속출할 것』이라고 전망했고,이인제 의원(민자)은 『시대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면 대량 도태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정치불신의 원인에 대한 진단은 민자ㆍ평민ㆍ민주당의원 모두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남북 문제,소ㆍ동구의 변화,북방외교 등의 변화물결속에 정치권은 구태의 모습에서 허덕이고 물가상승ㆍ치안부재 등 시급한 민생문제는 뒷전에 두고 정략적 대결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국민적 비판을 시인하고 있다.
오유방 의원(민자)은 『국민들은 정치인들이 정권적 욕망을 채우는 데만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했고 이상수 의원(평민)은 『여당은 3당통합으로 장기집권만 도모하지 경제문제 해결,민주화 의지를 못 보이고 있고 야당은 통합도 못해 거대여당에 효과적 대응수단을 잃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민자당의 고질화된 당내 계파사이의 갈등,야권의 통합을 둘러싼 지루한 공방은 한마디로 국민들의 정치염증을 부채질하고 있음을 정치권은 인정한다.
민자당은 정국불안의 핵심이 집권여당인 민자당이 장기정국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하는 데 있다고 자체 분석하고 있다.
이종찬(민자) 의원은 『내각제로 갈지,대통령제를 유지할지,정국 장래가 불확실한 가운데 정국안정은 회복되기 어렵다』고 했고 오유방 의원은 『민자당의 진로가 방향상실로 비춰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야당의 무기력도 한 원인이다.
박석무 의원(평민)은 『야권통합을 통한 대체세력의 면모,정치변화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 정치권의 무력과 무능에 대한 진단에서는 여야가 거의 시각의 일치를 보이고 있지만 정치권의 처방은 여전히 「정략적」이다.
김중위 의원(민자)은 『집권당의 역량회복이 선결 문제』라고 강조했고 황병태 의원(민자)은 『계파간 갈등 이미지를 씻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야당측은 내각제 개헌포기선언 등이 있으면 문제가 해소될 것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런 「정략적 처방」 때문에 문제해결의 가망성은 보이지 않고 정치불신의 회복전망도 불투명하다. 평민당이 국회에 복귀해도 파행정국으로 정기국회가 끝날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 전망이다.
양 김씨가 대치하는 양극구조에서 정치위기 해소는 쉽지 않으며 세대교체론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수단과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의 역량부족,정치인의 함량미달이란 국민적 불신을 극복할 수 있는 전망은 극히 불투명하다는 게 현 정치권의 위기의 본질이다.<박보균 기자>
◎정치권 입장/“내각제 등 결단을”… “3당통합 때문”
▲남재희 의원(민자)=여러 여론조사를 통해 나온 바도 있지만 우리가 느끼는 국민들의 정치ㆍ정치인들에 대한 불신은 대단하다.
우리 정치인은 다음에 국민들로부터 추상같은 응징을 받을 것이라는 확실한 느낌이며 가까이는 14대 총선에서 불신 때문에 이변이 속출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YSㆍDJㆍJP 등 정치인의 약자놀음ㆍ파벌놀음ㆍ대권놀음은 있을 수 있지만 요즘 이것이 정치의 전부로만 비춰지고 있다. 정치노선ㆍ정치적 이상은 행방불명 상태다.
독일 통일 등 국제적변화,북한의 변화 가능성,수해ㆍ증시 등 경제불안 앞에서 정치인이 보여주는 것은 공전하는 국회다. 여기엔 까닭이 있겠지만 그런 것들이 국민과 완전 유리되어 있어 모두가 공허한 말싸움으로만 비춰지고 있다.
국민들의 압도적인 불신에 대응하기 위해선 국회의원이 되기 위한 당선경쟁,대권만을 위한 집권경쟁이 시정되어야 한다.
여당은 지자제ㆍ국가보안법 문제에 선진사회다운 논리로 답을 내리고 개혁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개헌 문제는 올해가 가기 전에 결론을 내려야 한다.
야당은 일방적 선언에 의한 등원을 하고 국회에서 대책을 내놓고 싸워야 한다.
▲조세형 의원(평민)=우리 정치가 출구없는 미로에 빠진데 대해 참으로 큰 책임감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정치가 왜 갑자기 이 지경이 되었는지의 원인은 자명하다.
난데없는 3당통합ㆍ내각제개헌 기도가 모든 화근의 출발점이었던 점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이 원인을 치유하는 것이 곧 정국경색을 뚫는 길이 된다.
여당은 원인치유보다 결과적 현상의 다급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런 대안 제시도 없다.
대안이 없는게 아니라 여당 스스로 3분되어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는 여당을 대표해서 노태우 대통령 스스로가 결단을 가지고 나서야 한다.
우리 현실은 물가ㆍURㆍ민생치안ㆍ수해ㆍ증권ㆍ예산ㆍ남북관계ㆍ중동 등 엄청난 할 일이 산적해 있다.
솔로몬의 지혜를 가지고 현실타개에 임해야 한다. 그러나 잘못의 재발방지 보장책만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자칫하면 현 정치권 전체가 커다란 국민의 불신에 빠질 것이다.
◎학계진단/세계변화 수용 못한 채 구습 되풀이
정치권 외곽의 진단은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는 정치인의 구습적 행태,민생 문제 해결능력 부족,대권 접근에만 집착하고 있는 점을 들고 있다.
김호진 고대 교수(정치학)는 『국제사회가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데 변화를 수용해 줘야 할 정치권이 구태의연한 행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거꾸로 위기감을 부채질,정치불신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고 지적한다.
길승흠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집권세력은 북방정책에 대한 부분적 성과만 따진 채,예를 들어 주가폭락ㆍ우루과이라운드협상에 대한 대응의지ㆍ능력의 미비함을 보여 불신을 사고있으며 야당도 마찬가지』라고 진단했다.
길 교수는 『민자ㆍ평민당 모수 정치과정의 산출(정책) 보다 투입에만 집중적 관심을 쏟는 「권력에의 투쟁」에 골몰하고 있다』고 했고 김 교수도 『여야 대치의 구도ㆍ행태ㆍ인물이 모두 옛날 그대로인 상태에서 대권획득에만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문제점을 꼽았다.
길 교수는 『청와대의 정치적 리더십의 허약함에 대한 문제제기도 있어야 한다』며 『우리 사회의 계층적 현안문제를 장기적 비전과 정책선택을 통해 해결하려는 「큰 정책정치」가 필요하다』고 처방을 내린다.
김 교수는 『정치인의 대권추구 실현방식이 시대발전에 맞도록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력 다툼에서 헤어날 수 없는 현재의 정치적 체질을 지적한 길 교수는 『대중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기존 정치권은 세대교체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3김 퇴진론의 현실적 어려움을 지적하면서 『세대교체론을 당내민주화ㆍ선거라는 게임의 법칙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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