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무자격 행위" 벤처들 "학술적 근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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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 사는 이모(40.여)씨는 요즘 초등학교 6학년짜리 딸(12)의 일기 지도에 열심이다. 딸의 머리카락 다섯 가닥을 뽑아 의뢰한 유전자 검사에서 "명랑.활발하고 공명정대한 성격이지만 마무리가 부족한 타입이다. 바둑이나 서예.일기 쓰기로 단점을 보완해 주는 게 좋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씨는 "내 아이에 대해 잘 알고 싶어 검사를 했는데 결과가 족집게처럼 나왔다"며 만족해 했다.

최근 학부모들 사이에서 유전자 검사가 인기를 끌고 있다. 친자 확인에 주로 쓰이던 유전자 검사가 아이의 성향과 학습 지도 방법을 확인하는 데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유전자 검사는 174개 의료기관과 바이오벤처업체에서 하고 있다. 이 중 30여 개 바이오벤처업체에선 순수 연구가 아닌 상업적 목적으로 유전자 검사를 이용하고 있다. 개별 검사비는 3만~8만원 수준이다.

유전자 검사 업체의 한 관계자는 "'머리카락만으로 자녀의 인생을 알 수 있다'는 건 과장광고에 불과하며, '유전자 궁합' '롱다리(왜소증) 검사' 등도 사기에 가깝다"며 규제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 "질병과 성향까지 예측한다" 홍보=고교 1학년 자녀를 둔 김모(44.여.서울 자양동)씨는 자식의 진로 문제로 고민하다 8월 다른 학부모 7명과 단체로 아들의 유전자 검사를 신청했다. 김씨는 "아이가 컴퓨터만 좋아해 걱정했는데, 검사에서 '중독성'이 높아 그쪽으로 계속 공부해도 괜찮다는 결과가 나와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유전자 검사 업체들은 주로 치매.암.골다공증 등과 관련된 유전자가 있는지를 검사해 질병을 예측한다. 최근엔 학습과 관련된 우울증.호기심 등의 검사가 인기다. 검사 결과 '폭력성'이 높으면 "가급적 매를 피하라", '중독성'이 강하면 "다양한 과목에 관심을 가지도록 지도하라" 등의 지도 방법을 알려준다.

한 유전자 검사 업체 관계자는 "유치원생과 초등학생 학부모가 주로 찾으며 지난달엔 40건 정도 의뢰를 받았다"며 "어린이집이나 아파트 주부들이 단체로 신청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 과학인가 무자격 의료 행위인가=이 같은 유전자 검사들은 내년부터 일반인들이 할 수 없게 될 전망이다. 정부가 "과학적으로 입증이 안 된 유전자 검사가 국민을 오도할 수 있다"는 이유로 유전자 검사를 금지 또는 제한하는 내용의 대통령령을 올해 안으로 마련키로 했기 때문이다.

금지 대상 검사는 총 20종. 이 중 비만.치매.호기심.우울.폭력 등 8가지 검사는 금지키로 지침이 정해졌다. 7일엔 체력.장수.골다공증 등 나머지 12개 검사에 대해 금지 여부를 논의하는 공청회가 열린다.

의료계는 검사 제한을 적극 주장한다. 순천향대 부천병원 이유경(진단검사의학) 교수는 "호기심.체력 등의 유전자는 연구마다 영향력이 다르게 나와 과학적 타당성이 부족하다"며 "유전자 검사가 일반인들에게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사고를 부추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우울 유전자의 경우 우울증 발생에 끼치는 영향이 30%에 불과한데도 검사를 받은 사람은 '우울증 유전자가 있으니 우울증에 걸린다'고 오해할 위험이 크다는 것이다. 의료계는 의사가 아닌 사람이 병을 '진단'한다는 점에서 유전자 검사가 무자격 의료 행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이오벤처업체는 "유전자 검사는 학술적 근거가 있고, 질병 예방 차원에서 필요하다"고 맞선다.

D사 관계자는 "예컨대 치매 유전자가 나오면 '병에 안 걸리도록 녹차를 마시고 손 운동을 많이 하라'는 정보를 줘 병을 예방할 수 있지 않으냐"며 "유전자 검사는 진단이 아니라 심리 검사 같이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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