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근대 정치 토대인 사회계약론은 인종차별 이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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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인종계약

원제:The Ra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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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W 밀스 지음,
정범진 옮김, 아침이슬 270쪽, 1만5000원
원제 : The Racial

"인종간의 차이는 매우 근본적이고…그래서 (검둥이가) 말한 것이 어리석다는 명백한 증거는 그가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온통 검다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고약한 말을 했을까. 흑인 탄압으로 악명높은 KKK단원일까. 아니다. 근세철학의 거봉 이마누엘 칸트의 말이다. '아름다움과 숭고함의 감정에 관한 고찰'이라는 책에 나온다. 칸트에 대해 막연히 고상한 인상을 지녔던 사람에겐 의외일 것이다.

인종차별, 더 정확히 말해 백인우월주의를 전제로 했던 것은 칸트의 철학만이 아니다. 저자는 근대 정치체제의 사상적 토대인 사회계약론이 인종차별주의를 깔고 있다고 본다.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를 형성했다는 게 사회계약론의 요지다. 민주주의의 사상적 배경이기도 하다.

별 무리가 없어 보이는 이 논리에 저자는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댄다. 사회계약론이 말하는 자유와 평등은 오직 백인들의 전유물이며, 유색인종은 철저히 배제돼 있다는 것이다. 사회계약론자들이 만민평등을 외칠 때 '만민'이란 '모든 백인'일뿐 유색인종은 쏙 빠졌다고 한다.

저자는 이를 야유하는 표현으로 '인종계약'이란 말을 쓴다. 인종계약의 핵심은 백인에게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적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색인종에 대한 착취도 정당화된다. 백인은 인종계약의 서명자이지만 유색인종은 계약의 대상물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서구의 주류 이론이 근대 정치체제의 핵심을 밝히지 못하거나 오히려 은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겉으로는 계몽적이고 이성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지만 그 뿌리엔 인종에 대한 날조된 환상이 도사리고 있다는 얘기다.

인종계약은 백인우월주의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저자는 전형적인 사례로 일본 제국주의를 꼽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내세운 '대동아공영권'은 다른 아시아 인종에 대한 일본인의 우월감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어느 인종, 어느 민족이나 자기중심적 인종관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그렇다면 인종이란 생물학적 개념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개념인 셈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저자는 허위의식에 대한 투쟁을 제시한다. 환상을 깨자는 얘기다. 그렇지 못하면 정의(justice)는 보편성을 잃고 늘 '우리만(just us)의 정의'에 머무르고 말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인종계약을 투쟁의 철학으로 이해한다면 반쪽만 본 셈이다. 인종계약은 인간의 비윤리적 차별의식을 비판한다. 사실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는 잣대가 어디 인종 하나뿐인가. 단일민족인 우리의 경우 지연.혈연.학연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가. '무호남 무국가'라는 말이나 '우리가 남이가'라는 외침은 자기들끼리 울타리를 쳐놓고 남을 배제하려는 지역계약이요, 인종계약의 곁가지다.

저자는 우리의 이 같은 허위의식을 강타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종계약은 본질적으론 인간성의 회복을 촉구하는 자성의 철학이다. 일리노이대 철학과 교수인 저자는 차별의 고통을 잘 이해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다.

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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