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군중데모(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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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소련에선 어딜 가나 줄 서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한 관광객이 소련사람에게 물었다. 『무엇하는 사람들인가요.』 소련사람이 대답했다.
『담배를 사려는 사람들입니다.』 『왜 담배가 귀합니까.』 관광객은 다시 물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때문이지요. 소련 연방에서 뛰쳐 나가려는 공화국의 사람들이 담배를 제때에 공급하지 않습니다.』
관광객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그럼 고르바초프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습니까.』 소련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꾸했다.
『저 행렬을 보세요. 담배를 사려는 사람들의 행렬보다도 길게 줄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고르바초프를 죽이려는 사람들입니다.』
글쎄,고르바초프를 「죽이려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그 소련사람은 주위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버젓이 한다. 그런 조크가 외국인의 귀에까지 들릴 정도면 그 사회의 분위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소련땅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이면 누구나 제일 먼저 실감하는 것이 있다.
끝도 없이 넓고 넓은 그 소련이 온통 비어 있다는 인상이다. 그 텅빈 상점들 앞에 사람들은 마냥 줄을 서서 기다린다. 그것이 삶이고 생활이었다.
모스크바가 자랑해마지 않는 굼백화점은 서울의 명동을 합쳐 놓은 것만한 규모인데 그 많은 상점들엔 상품이 없었다. 태반이 문을 닫고 있거나 파는 물건이라곤 인형과 허드렛 옷가지 등속이었다.
길거리에서 외국인이 담배라도 피워 물면 멀쩡한 청년이 다가와 옷소매를 건드린다. 담배 한대만 달라는 시늉이다. 체면이고 뭐고 없다. 호텔식당의 종업원은 고객의 식사가 끝날 때쯤엔 거의 예외없이 냅킨에 무엇을 둘둘 말아가지고 와서 내민다. 캐비어(철갑상어알젓) 아니면 「밀리터리 워치」다. 밀리터리 워치란 투박하게 생긴 손목시계다. 말이 시계지,나중에 들여다보면 바늘은 움직이지 않는다. 때로는 암버(호박)목걸이를 사라고도 한다. 식당종업원이 말이다.
요즘 모스크바에선 고르바초프 물러가라는 데모가 일어났다. 수만의 군중은 페레스트로이카의 요란한 소리에 비해 소련사람들의 마음과 위를 별로 채워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조바심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소련안에서 보는 고르바초프와 바깥에서 보는 고르바초프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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