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광주거리에서 듣는『손에 손잡고』|2년만에 다시 가본 중국|「손문과 아시아」학술회의 참가 기 민두기<서울대 교수·동양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1988년 6월-그때까지만 해도 중국방문은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 무렵 아주 특례 적 상황에서 비자를 얻어 중국으로 들어가 보니 놀라운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가 중국을 다녀온 뒤, 더 정확히 말하면 올림픽 뒤부터는 원하기만 하면 거의 아무나 중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중국에 6·4천안문 사태라는 엄청난 격동이 전개되었다. 사람들은 오늘날 쿠웨이트를 탈출하는 것처럼 중국의 여러 공항을 빠져 나왔다. 그로부터 2년 만인 지난8월초 나는 다시 중국을 방문했다. 중국은 그동안 어떻게 달라졌는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변화는 적지 않았다. 우선 공항에서부터 달라진 것이 많았다.
입국검사 실 바닥에 짐을 쏟아 놓고 각자 찾아가게 하던 것이 지금은 어설프나마 짐 찾기 회전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공항확장공사도 진행중인 듯 싶었다. 나의 시선을 특히 끈 것은 2층 휴게실로 올라가는 계단 위에 써 붙였던『You are Welcome』이라는 어설픈 플래카드가 없어지고 그대신 도안도 산뜻한「상장」이라는 안내간판이 붙어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둘러본 시골도시의 공장입구에는 참관환영의 뜻인 듯 『You are Welcome』이 아직도 붙어 있기는 했으나 적어도 광주공항만은 어설픈 줄도 모르고 영어로 표기하려는 촌티는 가시고 없었다.
집 찾기 회전 대 설치 이상으로 의미 깊은 변화일수 있다.

<북한의 번호만 빠져>
주강을 높이 굽어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지어진, 향 항과 합작해 최근 완성된 호화로운 백천아 호텔에 짐을 풀고 나서 무심코 서랍을 열어 보다가 89∼90년판 광주시내 전화번호부를 발견했다. 5백55페이지에 달하는 이 전화번호부는 놀랍게도 개인용 전화번호 부문에 69페이지를 할애하고 있었다.
놀라운 변화였다. 2년 전에 개인용 전화가 얼마나 됐었는지 꼭 집어 대비할 수는 없으나 개인용 전화가 그동안 놀라게 많아졌음은 내가 받은 많은 중국인 학자의 명함을 통해서도 이같은 변화의 추세는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이번에 중국을 다시 방문한 것은 손문의 고향인 중산현취형촌에서 열린「손문과 아시아」라는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하기 위함이었는데 그 회의에서 많은 중국인 학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명함을 교환했던 것이다.
2년 전에 만난 어떤 학자의 명함에도 개인전화번호가 있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던 것인데 이번에 받은 30여장의 명함 중 8장에 개인용 전화번호가 기재되어 있었다. 자기 집의 주소가 기재되어 있는 것도 적지 않았다. 외국인을 자기 집에 초청도 안 할 뿐 아니라 집 주소도 알려주기를 꺼리던 중국에서 이렇듯 급격하게, 그리고 착실하게 개인의 사적 영역이 확대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전화회선의 증가야 기술상의 문제, 재정상의 문제만 해결되면 가능한 단순한 진보이지만 그것이 가져올 생활형태의 변화 의미는 복합적이고 충격적인 것이다. 서울도 전화를 걸려고 국제다이얼 직통전화(ISD)의 국가별 지역번호를 찾으니「남조선」이 모든 서방국가와 쿠바·불가리아·알바니아 등과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 이것도 하나의 의미 있는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북조선」만은 없었다. 전화번호부에 시장과 구(청)장의 전용전화번호가 나와 있는 것도 특이한 것이었다. 중국은 역시 변화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광주시내에서 택시를 타보고 크게 놀란 것이 있다. 운전 수와 승객사이를 쇠창살로 막아 놓고 요금을 주고받는 구멍만 둥그렇게 뚫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2년 전에는 분명 없었던 것이다.
광주가 전국에서 인구유입이 제일 활발하다는 말은 2년 전에 들은바 있다. 시골에서 광주로, 내지 성에서 광주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것이다. 아편전쟁 때의 반영싸움터로 유명한 삼원리에는 신강성에서 온위그루 인들이 무리를 이루고 살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자연범죄자도 많아진다는 것이었다.
2년 전에는 여기저기에「도적조심!」이라고 써 붙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오늘날에는 그것이 택시의 방범 망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다. 이것 역시 거스를 수 없는 변화의 흐름의 일부일까.

<언론들 다시 당 미화>
이같은 분위기와는 대조적인 변화도 물론 볼 수 있다. 광주일보 8월8일자에는 당의 지도와 공장경영이 잘 조화된 모범 직장으로서 광주타이어공장의 사례가 소개되어 있었다.
기업의 능률을 올리고 당 간부의 부패 소인을 없애기 위해서는 당이 기업, 심지어 행정에서도 손을 떼어야 한다는 당정 분리 논이 팽배했던 것이 2년 전의 일이었다. 심지어 유능한 공장경영자를 공개모집하기까지도 그 무렵에는 했던 것인데, 이젠 당의 지도·감독을 미화하는 기사가 실리고 있는 것이다.
광주시의 사면 우체국 앞을 지나다 벽보게시판에「뇌 봉을 본받자」는 화보가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모택동 사상을 충실하게 실천에 옮긴 모범군인당원 뇌 봉이 순직한 뒤 1963년부터 모택동·주은래가 앞장서「뇌 봉 본받기 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였었다.
공산주의 품덕이 높고, 사랑과 미움을 분명하게 밝혔던 뇌 봉은 무엇보다 사를 버리고 공을 앞세운「빛나는 집체 주의사상」으로 해 전 인민의 모범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원이 되는 것이 선망의 대상이 되지 않게 되고, 당의 권한이 여러 분야에서 축소되는 듯 보이던 80년 이후의 개혁·개방풍조에 따라 뇌봉은 거의 완전히 잊혀지고 있었는데, 작년6월의 천안문사태 이후 뇌봉 학습운동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사면우체국에 붙은 화보는 퇴색된 채 아무도 바라보는 사람이 없었고,『빛나는 모범-뇌봉』이라는 뇌봉 학습교재가 대량출판은 됐으나 파는 곳이 별로 많지 않은 현상 또한 오늘날 중국이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왕년에 모택동이 농민운동 자를 길러 낸 광주농민운동 청습소 건물에도 게릴라투쟁 시기 모택동의 내핍·전투정신을 나타내는 정강산 정신을 발 양하자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으나 그 길 건너 라디오 점에서는 서울올림픽의 노래『손에 손잡고』를 크게 틀어 대고 있었다.
88년이나 오늘이나 간에 광주의 거리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거리거리마다 보도에 자리잡고 있는 즉석 자전거 수리 자들일 것이다. 자전거가 중국의 가장 일반화된 교통수단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풍만한 수량으로 광주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거대한 주 강을 수없이 많은 도선이 오가는데 그 모두가 사람과 자전거를 같이 싣고 다닌다. 카페리 아닌 자전거 페 리인 셈이다. 경제활동이 활발한 광주로 사람이 밀려드니 일거리는 적고 사람은 넘치게 마련이다.
그들 중 손재주 있는 사람이 간단한 연장 몇 개로 벌어먹을 수 있는 것이 자전거 수리 업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전거타이어에 바람을 넣는 기구하나만 갖고 서 있기도 한다. 1924년에 광주에서 열렸던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건물을 구경하는 길에서 본 구직의 모습은 범상 찮은 감회를 자아내게 했다.
넓은 길의 가로수 밑에 자리잡고 자기의 기술이나 기능을 적은 종이판을 세워 놓고 앉아 있는 구직청년들은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얼른 그 구직광고판을 감추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들은 그래도 성실한 편이고 조금 껄렁한 친구들은 거리의 가드레일 주변에 대여섯 명, 또는 7, 8명씩 웃통을 벗어 던진 채 모여 시시덕거리고 있는 것이다.
광주를 떠나「손문과 아시아」국제회의가 열린 중산 시로 갔는데, 어느 날 중산 시 당국이 산업시찰을 시켜 주었다. 새로 지은 양로원, 새로 지은 아파트와 아울러 중산시가 자랑하는 폴리에스터 섬유공장을 구경시켜 주었다. 완전자동으로 움직이는 이 공장의 넓은 공간에는 돌아가고 있는 기계를 바라보고 서 있는 여공이 한 두 사람 뿐이었다.
넓은 공장전체에서 기계를 다루는 공원은 십 수명을 넘지 않을 듯 보일 정도였다. 거의 무인에 가까운 이 공장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먼저 떠오른 것이 광주시내에서 본 그 구직자의 무리들이었다. 19세기말 유석홍이라는 외교관은 런던 타임스 사를 방문하여 10여명의 직공이 하루에 28만 부를 인쇄하는 것을 보고 왜 사람을 늘려 한사람이 하루 1백부만을 인쇄하게 하여 2천8백 명의 공원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느냐는 엉뚱한 질문을 한일이 있는데 20세기말에 사는 나도 유석홍과 같은 생각을 하고 싶어졌다.
최신식 폴리에스터 공장이 만들어 내는 이익이 언제, 어떤 방법으로 거리에 서서 일자리를 구하는 그 구직자들에게 돌아갈까.
중국의 지방신문들은 대부분이 두 장 짜리 4면이다. 광주의 경우 남방일보·광주일보·양성만 보 등 이 있는데 모두 4면 짜리다. 그러나 사회는 알게 모르게 변화를 거듭하고 있는데 그 변하는 사회의 구성원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이들 신문은 충족시켜 줄 수가 없다.
아침이나 저녁때 거리에서 가장 불티나게 팔리는 상품은 신문이다. 주강가의 의자에 앉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늙은 퇴직자들이나, 각 직장의 퇴근시간이 되려면 아직 먼 시간에 유화공원의 호숫가에 앉아 있는 청년은 2면 짜리 신문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는 것 같았다. 텔레비전 뉴스도 중앙의 것이건, 지방의 것이건 간에 전하는 것은 주로 어느 공장의 생산고가 얼마나 올랐다거나 어느 공장의 생산고가 얼마나 올랐다거나 오니 농촌의 어떤 작물의 수확고가 얼마만큼 올랐다던가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정보획득요구에 상응하지 못하는 중국의 매스컴의 모습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중국의 호텔 방에 비치된 텔레비전,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의 거의가 일본제이다.
2년 전에 광주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것의 하나는 자동차가 우측 길로 달리게 되어 있는데도 운전석이 우측에 달려 있는 일본제거가 그대로 버젓이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손님은 좌측으로 내려야 하므로 보도 쪽 아닌 길 한가운데 내리게 마련이다.
구내의 가난과 최신의 호화생활이 사이좋게(?) 이웃해 있는 모습도 여전했다.
내가 묵었던 백천아 호텔은 관광영업을 위한 특수지대니까 그 최신식 순 서양식시설이 우중충한 주민들의 거리와 이웃해 있어도 어쩔 수 없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구정물같이 혼탁한 주강의 물 속에 뛰어들어 혹은 목욕을 하고, 혹은 수영을 하는 보통시민들의 바로 옆에는 「국제테니스클럽」이라는 간판을 단 정구장이 있다.
하얀 반바지와 짧은치마를 입은 분명 중국사람으로 보이는 젊은 중국인남녀들이 새벽녘이면 쾌활하게 테니스를 즐기고 있다. 그 옆 하안 공원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그 느릿한 태국 권 운동을 보통시민들이 묵묵히 하고 있었다.
중국의 물가는 2년 전에 비해 많이 진정됐다고는 하나 호텔 가까이 의 노점에서 사 먹은 지지(열대성과일)한 묶음은 15원이었고 그 무렵 한참이던 멀리 신강성에서 온 합자 멜런 하나 값이 14원이었으니 보통 노동자 월 평균 급여의 10분의1정도가 되는 셈이다. 물가구조의 비정상성은 여전한 것이다.

<새 키우는 모습 감동>
광주의 사면지구는 서울의 여의도처럼 주강에 삼각주로 형성된 섬으로서 지난날 영국인의 전용거주지역이었다.
영국인 한 가정이 살았을 깔끔하고 아름다운 건물은 오늘날 보통 중국인들이 옹기종기 쪼개 살고 있다. 그러니 밖으로 나 있는 베란다는 베란다구실을 못하고 허드레 창고가 되어 있고 실내의 계단 밑 공간도 침실로 뒤바뀌어 있다. 자기 소유의 집이 아닌 탓도 있겠고 교육정도가 낮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활양태 탓도 있겠으나 잠깐 들여다본 그들의 생활공간은 지저분하고 우리를 역하게 하는 냄새까지 났다.
우리처럼「잘 살게 된」「근대화된」사람들의 거의는 이맛살을 찌푸리게 마련이다. 그 「잘 살게 된」사람의 하나인 범용한 나를 호되게 꾸짖은 것은 한 마리의 새였다.
어느 날 아침 호텔을 나와 그 지저분한 보통사람들의 거리를 산보하는데 그 역한 냄새가 나는 더러운 집에서 한 노인이 천으로 씌운 새장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본 것이다. 새의 아침운동을 시키러 가는 것이다.
그 지저분한 공간에서 새를 길러 새소리를 즐기는 중국 보통사람들의 생활의 멋, 그것이야말로 생활의 질을 높이는 것으로 문화가 아니고 무엇일까.
해방직후에『사억의 화과』라는 항일전쟁다큐멘터리를 보았을 때 아비규환의 피난민 보따리 끝에 새장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가고 있는 것에서 받았던 깊은 인상-오래 잊고 지냈던 그 강렬한 인상이 되살아났다. 중국인들은 서양인들이 코피를 물에 타서 「질 높은」음료를 만들기 훨씬 이전에 이미 물을 그저 해갈하기 위해서만 마시지 않고 더 맛있게 마시기 위해 차라는 것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울러 생각해 냈다. <끝>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