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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상야 가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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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일본에서 유일하게 상감기법의 청자를 만들어내고 있는 곳은 고다(고전)자기뿐이다. 고려상감청자를 그대로 닮은 고다자기를 대대로 전승해온 아가노(상야)가는 규슈중부 구마모토(웅본)현에 있다.
「원조고전소」라는 커다란 간판만 없다면 여느 가정집과 다를 바 없는 시내 주택가 골목 안 2층집이 상야가의 작업장이자 도자기가게이며 살림집이다.
골목길에 면한 1층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니 도자기를 진열, 판매하는 도자기상점인데 이댁의 젊은 며느리가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회색 빛 약간 많아>
잘 정돈된 선반에는 큰 접시들과 화병·다기·술잔 등 다양한 형태의 상감청자들이 진열되어 있다. 고다자기는 고려상감청자보다는 회색기가 더 많이 도는 옥색을 띠고 있고 큰 접시 중에는 기하학적인 선이 교차하는 현대적인 문양도 있지만 학·구름을 비롯, 조선시대 분청사기에서 볼 수 있는 인화문 등 우리 전통문양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진열실에 잇대어 있는 작업실은 우리 나라 대청마루를 연상케하는 넓은 마루방인데 마루에 앉아 발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편안히 물레를 돌릴 수 있도록 구멍을 판 작업대가 세군데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가 며느리에 의해 작업실에 안내되었을 때는 부자가 함께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들은 물레를 돌려 그릇의 형태를 다듬고 아버지는 그릇표면을 조각도로 파내고 백토로 메워 상감문양을 새기고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이 내려쓴 돋보기 밖으로 빛나는 아가노 사이스케(상야재조·61)는 『저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도공 손가이(존해)의 11대 직계후손이고 저기서 물레를 돌리고 있는 아이가 12대를 이어갈 아들 히로유키(호지·34)입니다』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11대 상야는 조상의 고향을 부산근방으로 알고 있지만 아직 한번도 가 본적이 없다고 한다.
일본에 온 손가이는 처음 가라쓰(당률)에서 다른 조선도공들과 가마를 만들어 도자기를 굽고 있었는데 그의 솜씨가 우수해 호소카와(세천)영주의 귀에까지 들어가 후쿠오카(복강) 아가노무라(상야촌)에 있는 영주의 어용요 도공으로 발탁된다.
영주는 손가이에게 새로운 일본이름을 하사하는데 아가노무라 지면 을 따서 아가노 요시조(상야희장)라고 하고 신분도 무사계급으로 격 상시 킨 후 15석(1석은 한사람 1년 분의 식량)의 급료를 준다.
1632년 호소카와 영주가 구마모토(웅본)현 야쓰시로(팔대)시 고다로 전대되면서 손가이도 함께 데려와 고다야키(고전소)를 새로 시작하게 한다.

<89세로 일생 마쳐>
손가이는 어용요의 도공으로서 영주의 주문대로 여러 가지 자기를 만드나 초기에는 다카토리(고취) 비슷한 것도 만들다가 구마모토로 옮기면서 상감청자기법을 중점적으로 발전시켜나간다. 당시는 상감청자를 옥과 같이 귀하게 여겨 일반시민은 감히 가져볼 수도 없었다고 한다.
손가이는 1654년 89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고 그가 일구었던 옛 요지와 초대 상야의 묘는 사적지로 지정되어 야쓰시로시 히라야마(평산)에 남아있다.
『임진왜란 때 끌려온 많은 조선도공들이 서 일본 일대에 정착하면서 여러 가지 도자기 기법을 전해주지만 우리 선조께서 가장 어려운 기법을 전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상감은 작은 문양들을 정교하게 파내고 백토로 메워 다시 매끈하게 표면을 다듬어 낸 후 유약을 입혀 굽는, 공이 무척 많이 들어가는 기법이지만 무엇보다도 어려운 것은 아름다운 청자색을 발색시키는 것이지요.』
그 청자색을 얻기 위해 수없이 많은 실험을 거듭했지만 일본 미술관들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상감청자와 비교해보면 많은 차이점을 느낀다면서 아마도 이곳의 흙이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고 했다.
명치시대에 들어 영주의 어용요제도가 사라지자 고다자기도 그 맥을 잇기가 힘들어 진 다. 이 곳이 온건마을인 관계로 여러 여관주인들의 도움을 받아 한 동안은 고전소를 운영할 수 있었으나 전쟁 중 먹을 식량조차 부족한 상황하에서 아름다운 고다자기는 사치품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저는 우리 조상이 물려준 오랜 전통의 고다자기를 우리 대에 와서 포기할 수 없어 아버지는 고다자기를 계속 만들고 저는 이웃마을로 노동 일을 하러 다니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왔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하자 저도 다시 도공으로 돌아가게 돼 얼마나 기쁘 던지요.』

<10대에 천황 훈장>
아들의 도움으로 전쟁의 와중에서도 고다자기만을 만들 수 있었던 10대 아가노다이라(상야평)는 1971년 훈장 서보장(서보장)을 받아 가문에 영예를 가져온다. 이 훈장은 고다자기 화법이 천황에게 전해지면서 아름다운 고다자기를 만든 도공에게 주는 훈장이었다.
고등학교와 전문대학에서 요업을 전공하여 체계적인 학문으로 도자기를 공부한 아들 히로유키는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이 더 많다고 했다.
『고다자기의 원조는 조선이고 저는 조선도공의 후예지만 전통의 고수는 아버지대로 족하다고 생각하고 저는 문양이나 형태에서 현대감각이 가미된 자유로운 고다자기로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진열실에 있는 작품들 중 현대감각이 나는 고다자기들은 히로유키의 작품들인 것 같았다.
전시실 선반에 있는 그릇 중엔 부자가 각각 만든 똑같은 형태의 다기그릇이 있는데 가격차이가 있어 당연히 비잔 것이 아버지가 만든 것이겠거니 했더니 그 반대라고 한다.
『아버지가 만드신 것이라고 언제나 제것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지요. 제가 만든 것이 더 좋다고 생각될 때는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아요』라고 해서 아버지도 그것을 인정하느냐고 했더니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이 히로유키의 여섯 살 난 아들은 벌써부터 할아버지·아버지 옆에서 흙 반죽으로 그릇만 들기 놀이를 하면서 자라고 있다.
상야씨 댁을 하직한 우리는 자동차로 15분쯤 떨어진 야쓰시로시 히라야마에 들러 초대 상이야씨의 묘소를 찾아보았다. 산자락 과수원 한쪽에 남아 있는 상야의 묘에는 오랜 풍상으로 자연석에 새겨진 비문은 많이 마모되었지만 묘비 앞에 있는 두개의 고다자기 술잔이 조상에게 아직도 고다 자기의 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고하는 것 같았다.
글·사진:김민숙(서강대강사·사진작가) 공동 취재:송성희(미소화랑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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