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유관 꼭지」를 주목하라”/장두성(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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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국측이 우리정부에 대해 이라크 봉쇄작전에 적극 지원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소식이 흘러 나오고 있다. 한국이 수입하는 대부분의 원유공급처인 중동을 보호해 주는 대가를 치르라는 미국의 요구는 우리와의 특수한 관계에 비추어 거절하기 어려운 논리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의 외교영역과 미국의 외교영역 사이에는 서로간의 이익면에서 일치될 수 없는 부분이 점점 넓어져 가는 추세이기 때문에 그런 요구에 응할 수 있는 범위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처음부터 분명히 해 놓는 것은 우리외교의 앞날을 위해 필요한 기초작업이 될 것이다.
이미 80년대초,미국이 레바논에 파병했을 때도 한국군의 지원요청이 거론된 것으로 보도되었었다. 이번 경우는 아직 그런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만약 상황이 더욱 악화되고 장기화될 경우 지금의 지원요구 수준에 무엇이 더 추가될 것인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중동에 대한 우리의 외교에 한계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당장의 분쟁상황에 너무 현혹되지 말고 그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갈등 요인을 거시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의 가장 표면에 나타난 모습은 이란과 8년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난 빚을 진 이라크가 이 빚을 탕감받고 허물어진 경제의 숨통을 트기 위해 석유와 돈이 남아도는 소국 쿠웨이트를 무력으로 합병시켜 버린 「국제적 강도질」이다.
이 「강도질」은 미국과 소련을 포함한 거의 모든 국가들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냉전의 주역들이 어렵게 키워나가고 있는 평화공존의 새 세계질서를 국지분쟁의 확산으로 교란시키고 석유의 안정된 공급과 가격체계를 뒤집어 엎으려 들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라크의 쿠웨이트 합병이 기정사실로 굳어질 경우 국지분쟁은 더욱 불어나고 수백의 서로 다른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는 소련이나 중국까지도 민족단위의 분리주의가 이를 본보기로 삼고 이합집산을 시도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이 지역분쟁에 개입할 여력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가능성은 결국 세계곳곳에 널려있는 국지분쟁을 열전으로 폭발시킬 위험이 있는 것이다.
석유와 지역분쟁의 열전화 현상,그것은 우리에게도 경계해야할 절실한 문제인 것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아랍권 내부의 소수 혁명세력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세계의 국가들이 뜻을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야를 넓혀 보면 아랍세계 내부의 격심한 갈등 요인들이 또 다른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을 본다.
그것은 19세기 오토만제국의 와해로 해방이 된 아랍세계가 2차대전을 계기로 유럽국가들에 의해 분할된 이래 안으로부터 솟아오르고 있는 아랍민족주의의 결집력이다.
그 결집력의 주역 자리는 처음 이집트의 나세르가 차지했으나 그가 사라진 후 리비아의 카다피가 그 공백을 메우려 했고,민족은 다르지만 이슬람교의 동질성을 업고 호메이니가 등장했으며 지금은 사담 후세인이 그 역할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와 종교가 맞물려 있는 아랍ㆍ이슬람주의는 현실적으로는 중동이 나머지 세계를 울릴 수도,웃길 수도 있는 석유자원을 권력의 핵심으로 삼고 이념적으로는 십자군시대 이래 서양문명권에 압도되어 온 이슬람 문명권의 부활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의 바트 사회주의 정당이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는 아랍ㆍ이슬람세계의 통일은 따라서 대서방ㆍ대기독교문명에 대한 역사적 도전의 성격을 띤 것이다.
이와 같은 중동 아랍ㆍ이슬람세계의 소망은 중동에서 국경과 민족까지 초월하는 혁명의 잠재성을 갖고 내연하고 있다. 루시디가 쓴 『악마의 시』에 대해 그를 암살하라는 호메이니의 지시가 나오자 전 이슬람세계에서 보인 호응은 그 혁명의 잠재성이 얼마나 깊고 넓게 퍼져있는지를 보여준 한 예다.
후세인이 무력으로 형제국을 병탄했는데도 리비아ㆍ요르단 등의 국민들이 이를 열렬히 지지하고,반미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도 그런 잠재력의 한가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중동이 세계 최대의 석유공급처이며 엄청난 부가 거기서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것이 이슬람 세계ㆍ아랍민족주의의 부활에 활용되지 못하고 소수 왕족들의 치부와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친서방정책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아랍 민중들의 억제된 분노가 사담 후세인의 모험주의에 토양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 보기에 명백한 침략과 국제법의 위반행위도 아랍민족세력에는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번 분쟁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든간에 장기적으로 보면 중동산유국중 아직 남아있는 왕정과 그들의 친서방 정책성향이 줄어들거나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서방언론은 대개 후세인을 히틀러에 비유하고 있지만 폭넓은 역사적 안목으로 평가받고 있는 미국의 윌리엄 파프같은 논객은 오히려 그를 독일통일을 이룩했던 비스마르크에 비유하고 있는 사실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외교노선도 당장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장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아랍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혁명의 궁극적 방향이 아랍 민족세력을 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도 돌아가고 있는 추세를 주시해야 될 것이다. 우리외교의 기본방향도 거기에 맞추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관심사는 중동권력의 핵심인 송유관의 꼭지를 누가 잡게 되느냐는데 있기 때문이다.<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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