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는 사용금고와 금융질서(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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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가정용 금고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국내 5개 금고 제작업체의 올 상반기 판매 실적이 지난해에 비해 40%나 늘었으며 용량이 작은 것보다는 큰 것에 대한 판매 증가율이 더 높다는 것이다.
비슷한 현상으로 은행이 수수료를 받고 개인에게 빌려주는 대여금고에 대한 수요도 급증,은행마다 대여금고의 추가설치를 서두르고 있다 한다.
금고의 용도는 현금이나 수표의 보관뿐 아니라 주식등 유가증권ㆍ주요 문서ㆍ귀금속의 보관 등 용도가 다양한 만큼 지금 나타나고 있는 금고 수요 증가의 원인이 무엇인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정부의 사정활동과 부동산투기 조사가 강화됨에 따라 자금운용의 노출을 꺼리는 일부 계층이 당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개인금고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이는 그동안 얼굴을 가린채 은행ㆍ단자회사ㆍ증권시장 등 제도금융권에 들어와 있던 자금들이 제도권 밖의 지하로 숨어드는 현상의 하나로 보아 틀림이 없을 듯 싶다.
그리고 이같은 현상은 최근 사채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있다든가,뭉칫돈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등의 보도들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경제는 통화증발속의 자금난이라는 이상기류에 휘말려 경제 전체가 심한 혼란을 겪고 있다.
7월말 현재 총통화증가율이 21.3%에 달해 유동성의 과잉공급이 물가불안의 요인이라는 지적이 나오는가 하면 막상 돈이 필요한 기업들은 심한 자금난으로 급전을 둘러대기에 급급하다. 증권시장은 증권시장대로 자금이 빠져나가 침체가 가속화되고 있다. 그렇다고 부동산 시장이 활기를 띠고 있느냐 하면 이쪽도 5ㆍ8 투기억제조치이래 소강상태를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마디로 돈의 흐름이 정상경로를 이탈해 난맥상을 보이고 있으며 통화당국에서도 이를 바로잡을 엄두도,대책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같은 현상이 금고수요의 증가로 상징되는 지하자금의 제도금융권으로부터의 퇴장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단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자금흐름의 혼조는 근본적으로 금융자율화나 금융실명제 등 시기와 형편에 맞지 않는 제도개혁의 시행착오와 세련되지 못한 통화정책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동시에 최근 강도를 높여온 사정활동과 부동산투기 조사의 여파가 금융시장에 적지 않은 교란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고 본다.
물론 부정에 대한 척결이나 부동산투기의 발본색원은 잠시도 덮어둘 수 없는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이 이 사회의 신용질서를 뒤흔들고 경제에 혼란을 가져올 요인으로 작용할 정도라면 거기에도 문제가 있지 않나 여겨진다. 사제금고가 다시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유야 어쨌든 우리나라 금융질서의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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