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저작물 불법 번역·출판 "말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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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저작권 보호 규정을 어기고 외국 저작물을 무단으로 번역·출판하는 사람들이 다시 심심치않게 생겨나고 있어 UCC (세계 저작권 조약) 가입 4년째를 맞고 있는 한국 출판계에 대한 외국 원저작권자들의 불신을 부채질하고 있다.
보호 대상의 외국 저작물을 계약 없이 불법으로 번역, 출판하는 이른바 해적 출판 행위는 국내에 이해가 걸린 복수 이상의 출판 파트너가 있어 정식으로 문제를 삼기 전에는 적발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음성적인 불법 사례는 생각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사랑하는 나의 아들에게』 『사랑하는 나의 딸에게』 『어머니 당신의 모든 사랑이 고맙습니다』 등 3권의 번역 시집을 둘러싸고 도서출판 한겨레와 을지 출판사간에 빚어진 분쟁이 그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
미국 인기 여류시인 수잔 폴리스 슈츠가 원작자로 돼 있는 이 시집들은 당초 도서출판 한겨레 (대표 조명준)가 국내에 이전시인 바다 저작권 회사를 통해 저작권 사용 계약을 한 뒤 금년 봄 번역 및 제작을 모두 끝내고 적당한 출고 시기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러나 지난 5월말 을지 출판사 (대표 서정연)가 원저작권자와의 사전 계약 없이 이들을 무단으로 번역 출판, 시중 서점에 출고함으로써 말썽의 꼬투리를 만들었다.
을지 출판사는 이들 3권의 번역 시집을 해적 출판하면서 일률적으로 국제 저작권 보호 대상에서 제외되는 l987년 판을 텍스트로 했다고 밝혔으나, 『나의 사랑하는 딸에게』만이 86년 판이고 나머지 2권은 88년에 비로소 초판이 발행된 것이었다.
도서출판 한겨레 측은 즉각 바다 저작권 회사에 의뢰, 저작권자인 슈츠 여사에게 독점 번역권 행사의 합법성을 확인 받은 뒤 을지 출판사 측에 필름의 양도 및 출고된 책의 회수·폐기에 이은 종합 일간지에의 공개 사과 등을 요구했다.
한겨레와는 별도로 저작권자인 슈츠 여사는 지난 7월26일 국내의 김장 법률 사무소를 통해 을지 출판사에 저작권 침해 행위 중지 요청에 관한 공문」을 보내고 을지 측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정식 제소도 불사하겠다는 강력한 뜻을 비쳤다.
결국 양 출판사는 ▲을지측이 한겨레 측에 제작 필름을 모두 양도하고 ▲서점에 출고된 책은 이를 전량 수거해 폐기 처분하며 ▲이미 팔린 것에 대해서는 그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보상하도록 한다는 조건에 합의함으로써 말썽을 일단락 지었다.
지난 6월23일 서점에 선을 보인 성현 출판사의 『죽은 시인의 사회』 (원제 Dead Poets Society)도 경우는 다르지만 저작권 보호와 관련해 말썽의 소지를 안고 있는 책.
최근 국내 극장가에서 크게 히트하고 있는 같은 제목의 영화를 소설로 옮긴 『죽은 시인의 사회』는 처음 국내의 두서너 출판사에서 이를 번역 출판하기 위해 저작권자인 미 영화사 월트 디즈니와 접촉을 시도하다가 그쪽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손을 떼었던 것으로 지난 6월 하순 성현 출판사 (대표 조유성)에서 계약 없이 전격적으로 출판을 단행했다.
이 책은 발간 2주만에 교보·종로 등 대형 서점의 소설부문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등 판매가 크게 호조를 보이고 있으나 저작권자와의 공식 계약 없이 불법으로 번역 출판된 것이어서 비록 국내에서는 별 말썽이 없더라도 저작권자에게 인지될 경우 문제가 될 공산이 매우 크다는 지적이다.
성현 출판사 측은 『저작권 보호 대상 외국 저작물의 경우 일단 번역을 진행시키면서 사후에 계약을 신청하는 것이 국내 출판사들의 관행이었다. 우리는 책을 먼저 서점에 깐 뒤 지난 7월초 신원에이전시에 저작권 계약 신청을 했다. 절차상 문제가 있고 그런 의미에서 해적 출판임을 자인하나 저작권자와 얘기가 잘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는 한 저작권 중개업자는 『이런 사소해 보이는 해적 출판 행위 때문에 외국 저작권자들이 한국을 더욱 불신하게 돼 가뜩이나 어려운 국내 저작권 중개업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며 『국내 출판인들은 UCC 가입 이전의 관행에서 벗어나 저작권 계약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다져 나가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교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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