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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130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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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전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간부 잇단 체포… 당수습 고심/평양 박헌영과 연락루트ㆍ지방조직 결집 모색
한관영은 함흥고보 학생때부터 투사기질이 있었다. 보성전문학교시절 독서회의 책임자였고 해방직후 공산당이 재건될 때는 이미 중앙선전부 선전과장이었다.
그런데 46년 말 3당합당으로 남로당으로 되어 선전부장이 된 강문석과 의견충돌이 생겨 정태식밑 이론진의 일개 부원으로 전락했다.
그는 나보다 3∼4세 위이며 강문석과 충돌만 없었더라면 중앙선전부장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와 나는 이미 4∼5년전에 선전부ㆍ기관지부 과장연석회의에서 몇번 만난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폐병으로 각혈을 해 별다른 활동도 못하고 있었으나 투지만큼은 열렬하며 이북출신이라도 일편단심 박헌영 지지자였다.
나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는 경찰관의 집 아래채를 전세들어 살고 있었다.
해방직후부터 공산당 중앙에서 일해온 사람은 이제 나와 그밖에 없었다. 나는 정태식이 S검사의 유도작전에 걸려 체포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는 화를 내며 정의 경솔한 태도를 비판했다.
그것이 그의 성격적 결함이었다. 그는 비판을 참지 못했다.
그 때문에 강문석과 크게 싸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옳지만 지금 정의 경솔한 태도를 비판하고 있을때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막으며 문제는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는가,앞으로 당을 어떻게 이끌어가는가를 토의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정태식의 체포를 경찰이 발표할 때까지 하부당원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에 반대했다.
이때까지 지하당 최고지도부는 하부당원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우리의 역량과 현실을 알려 각자가 분발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당장 내일부터 곧 공작비는 물론 생활비도 한푼 없는 지경이라고 했다. 공작비 얼마 있던것은 정태식 아지트에 두고 있었다.
S검사에 관해서는 한관영도 그의 과거를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그로부터 십수년후 S는 박정권시대 간첩으로 체포되었다).
첫째로 할 일은 잔존조직과 연락을 취하는 문제였다. 당시 지하당의 잔존조직은 서울의 중앙위원회 기관으로서 내가 맡고 있는 중앙선전부,기관지부,이론진,블록통제지도부와 지방에는 지리산 빨치산부대의 이현상 및 그의 밑에 있는 경남ㆍ전남ㆍ전북도당이 있었다.
경북도당은 위원장인 배철이 팔공산속에 숨어 유격대를 조직하고 있었다. 충남도당은 위원장 이위상이 대전시내에 겨우 숨어있었다.
그외 서울시당ㆍ경기도당ㆍ충북도당ㆍ강원도당은 파괴되어 활동을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서울ㆍ대전ㆍ팔공산ㆍ지리산으로 조직이 각각 분산돼 고립되어 있는 것을 연결시키는 것이 첫번째 문제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중요한 문제는 평양의 박헌영과 연락을 취하는 문제였다.
해주에 제일인쇄소라는 남로당의 중간 연락소가 있었다. 초대 소장은 권오직이었으나 그때 권은 헝가리공사로 가고 없었다.
서울에서 해주로 연락하는 남북비밀루트는 이승엽의 심복인 안영달이 담당하고 있었다. 6ㆍ25뒤에나 알게된 일이지만 안영달은 49년 가을에 체포되어 경찰의 앞잡이로 변절했으나 경찰을 매수해 탈출했다고 당을 속이고 당내에 잠입,김삼룡을 체포했지만 그때까지도 그 비밀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물론 나도 그같은 사실을 모른채 북과의 연락을 위해 안영달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안영달은 김삼룡을 체포하고는 자기 정체를 감추기 위해 이북으로 가고 없었다.
그런데 나는 안이 이북으로 간 것을 모르고 그를 찾고 있었고 그렇다고 북으로 가는 루트도 몰라 직접 북으로 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다만 충남 대천해안이 대남침투의 상륙지점이 되어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원을 대천으로 파견,이북과의 연락을 취하려고 노력했다.
6ㆍ25가 터지고 안영달이 경기도 인민위원장이 되어 부임해 왔을때도 나는 반가워 그를 중앙청앞 붉은 벽돌 2층집까지 만나러 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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