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송호근칼럼

핵시대의 낭만주의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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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낭만!'이라는 말처럼 가슴을 울렁이게 하는 것이 있을까? 그것은 보잘것없는 것에 품위를 부여하고, 사소한 것에 화려한 의상을 입히는 연금술이다. 초로에 접어든 가수 최백호가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슬픈 색소폰 소리 들어가며 지나간 시간을 노래했듯이 말이다.

10월 19일 서울대 교정, 한국 정치사의 영욕을 한 몸에 짐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핵 문제와 햇볕정책'을 강연했을 때, 필자는 죄송스럽게도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듣는 줄 알았다. 유엔 결의안이 선포된 지 불과 며칠 지난 시점에서, 노(老)대통령은 대화와 대북 지원이 더 현명한 방법임을 역설했다. "북한 핵실험은 북한과 미국의 공동 책임"임을 강조했을 때, 유엔에까지도 햇볕을 쪼여 보겠다는 노정치가의 의지가 읽혔는데, 그것은 슬프게도 '흘러간 옛노래'처럼 들렸다. 유엔 제재안이 발효된 상황이라면, 그 노래를 틀 때가 아닌 것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왜 급파됐을까? 화상회의로 무한정 토론이 가능한 시대에 왜 구태여 서울까지 왔을까? 전공이 국제관계학인 그녀는 이 사태에 대해 누구보다 할 말이 많았을 터인데, 왜 부시 대통령의 전언(傳言)만 되뇌며 돌아갔을까?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도 유엔 결의안의 대상이 됩니까?'라는 이 지극히 초보적인 한국적 질문에 대해 '한국 정부가 결단할 일'이라고 간단하게 답했다. 아소 다로 일본 외상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전율이 느껴질 만큼 냉정한 이 말 속에는 '유엔을 주시하라'는 경고가 들어 있지만, 애써 흘려듣고 싶은 게 국내 안보 실세들의 태도다.

경고로 듣기는커녕 '자국 운명의 국제화는 망국의 지름길'임을 노래하는 낭만주의자도 생겨났다. '한반도의 운명을 어떻게 제대로 국제화할 것인가'가 지난 100년 한국외교사의 숙제 아니었던가? 그러니 "유엔에 우리 운명을 맡기면 자기 운명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이 정권 실세들의 한결같은 신념이 필자에게는 감상적 노래로만 들린다. 적어도 우리의 최백호는 '밤늦은 항구, 선창을 떠나는 연락선'의 뱃고동 소리를 '슬프게' 들을 줄은 알았다. '다시 못 올 것'을 깨닫는 한 그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김근태 의장은 금강산 관광이 민족사업이라 합창을 했고, 개성공단에서 춤을 췄다. 평범한 시민이라면 그러려니 했겠으나, 그는 집권당 의장이다. 핵실험은 국제정치 패러다임을 전면 교체했고, 한국의 외교적 선택을 완전히 봉쇄해 버렸다는 현실인식을 찾아볼 수 없다. 마치 IMF가 한국 경제주권을 틀어쥐었던 것처럼, 유엔 결의안 1718호는 외교주권의 이양을 포고한 것이다.

그것이 낭만주의자들의 노래로만 끝난다면 다행이다. '유엔 결의안이 적절한 수위인지를 파악하라고 지시했다'는 대통령의 토로는 무언가? 일본의 과민반응을 비난하는 표현이었다고 해도, '태풍의 눈'에 놓인 국가의 원수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유엔 결의안은 관련 당사국들에 '동작 그만'을 발령한 것이다. 고난의 행군을 해 왔던 차에 제재 수위를 높여 봐야 김정일의 심기만 사납게 만든다는 것이 대통령의 뜻일 터이고, 또 포용정책을 견지해야 할 타당한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제의 국제외교가 떠나버린 오늘,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를 불러제낀 뒤 적어도 이것만은 생각해야 한다.

핵무기 개발 지원의 창구로 당장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이 지목된다면? 그리하여 중소기업이 줄도산하고, 현대아산이 문을 닫고, 최대주주인 현대상선의 발이 묶인다면? 북한의 목을 더 죄어, 급기야는 수령체제에 붕괴 조짐이 비치고, 내부 혼란이 심화되고, 핵무기 통제를 위해 미국.중국.일본.러시아가 홋카이도쯤에서 4상회담을 열게 된다면? 아니면 인내력을 소진한 유엔 안보리가 7항 41조로부터 42조로 옮겨 군사력 동원을 탐색하게 된다면? 그때도 개성, 금강산, 대화와 지원, 포용정책을 외칠 것인가? "더 이상 핵실험은 없다"는 김정일의 말은 이 낭만주의자들에게 보낸 유혹의 편지임을 이들만 모른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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