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은 남침으로 시작"|소 IMEMO 연구부장 분석<노보스티=본사특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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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소련 IMEMO(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의 쿠나제 한국-일본 정치문제 연구부장은 한국전쟁 휴전 37주년을 열흘 앞둔 17일 지난 50년 한국전쟁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다고 밝혔다.
쿠나제는 남한이 전쟁을 도발했다는 소련 역사교과서의 서술은 거짓이며 이는 흐루시초프 회고록에도 스탈린의 허락에 의해 전쟁이 개시됐음이 명기돼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계의 항구적인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자유가 필수 불가결한 요체라고 전제, 이 때문에 한국전쟁이 이미 과거의 일임에도 불구, 이에 대한 재 고찰을 통해 실체가 규명되어야 하는 절실한 이유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쿠나제 부장이 노보스티 통신을 통해 중앙일보에 보내 온 특별기고 전문. <편집자 주>
지난달 25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지 꼭 40주년이 됐다. 돌이켜보건대 지난 세월들은 몸에 밴 조심성으로 점철되어 왔다.
흐루시초프 시절이 그랬고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그마저도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침묵과 정보통제가 너무 심해 소련 인들은 한국전쟁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다.
얼마 전 아들의 역사교과서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내용을 보았는데 매우 간단하게 서술돼 있었다. 당시 남한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가 1950년 6월25일 마침내 전쟁이 터졌다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실체를 은폐하고 조작된 허상만을 강요하는 조지오웰의『1984년』식 거짓말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완전히 개방되고도 과거를 재 고찰하는 새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가 한국전쟁의 진정한 의미와 그 중요성을 파악하기 위해 이 전쟁을 재 고찰하는 것은 정당하고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1백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이 전쟁은 20세기후반 들어 발생한 가장 비극적인 참변중의 하나로 기억될 것임에 틀림없다.
한국전쟁은 또한 앞으로 역사가들로 하여금 그 실체를 규정하는데 있어 많은 어려움을 갖게 할 것이 명백하다.
내 생각으로는 그 같은 평가작업 자체가 가능할지조차 의문이다.
한국전쟁의 실상을 규명해 줄 수 있는 자료들이 너무 많이 유실됐고 남아 있는 것 가운데도 상당부분은 시일이 지남에 따라 왜곡된 경우가 비일비재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물론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지사다.
그러나 그 여파는 지금까지 남아 한반도와 주변정세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전쟁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재평가를 해야 한다는 것 외에 그 새로운 평가를 토대로 현재와 장래의 국제정치를 풀어 나가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하는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다.
이것이 왜 우리가 이 시점에서 새삼스레 한국전쟁의 실체규명에 나서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며, 가감 없이 있었던 그대로의 실상파악을 하게 될 때 비로소 그 속에 담긴 역사의 교훈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꾸준히 추진해 온 적극적인 선전공세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의 시발이 북한에 의한 침략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공식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그렇다고 법정에서 시비를 가릴 성질의 것도 아니다.
따라서 나는 한국전쟁의 법률적 책임소재가 아닌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말하겠다. 만약 남한이 오랜 준비과정을 거쳐 의도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남한이 전쟁 초기에 그토록 철저하게 패배를 거듭했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는 이에 대해 법률적 개념을 떠나 논리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이미 오래 전 불명예스럽게 권력으로부터 축출 당한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이 지난 70년 서방세계에서 출판됐다.
그러나 우리는 엄청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는 이 책의 존재조차 무시해 왔다가 최근에야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흐루시초프는 회고록에서 한국전쟁이 북한의 사전각본에 의해 일어난 전쟁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흐루시초프는 이 책에서 지난49년말 김일성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어떻게 「남조선해방」 방안에 대해 논의했는지를 사실 나열방식으로 묘사했다.
흐루시초프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 스탈린은『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에 따라』 김일성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스탈린은 원칙적으로는 무력침공에 찬성하면서도 한편으론 김일성에게 성공적인 기회포착을 위해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충고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재차 방문했을 때 마침내 「축복」을 내렸다.
흐루시초프는 회고록에서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고 전쟁은 터졌다. 공격은 성공적으로 진행됐으며 북한군은 빠른 속도로 남으로 밀고 내려갔다』고 적고 있다.
이념적 「확신」과 정치적「계산」의 불안정한 균형이 70년대 초반 데탕트의 특징이다.
당시 데탕트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다가 단명으로 끝난 것도 이 때문이다.
70년대 초 데탕트에서 배워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지구상의 모든 국가가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보편적인 인간의 가치를 굳게 지키지 않는다면 결코 항구적인 평화와 참된 번영을 이룩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을 일으켰던 「혁명적 논리」가 단지 이에 수반될 위험에 대한 면밀한 손익계산에 의해서만 제한 받을 뿐 아직 지구 곳곳에 엄 존하고 있는 한 인류의 안전은 확보될 수 없다.
더욱이 위험에 대한 손익계산은 언제나 틀린 수치를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전쟁의 슬픈 역사를 「반면교사」로 삼아 복수가 사라진 세계문명을 일궈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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