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민주」를 깨는 국회/장두성(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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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79년 3월 28일은 영국 캘러헌노동당 내각이 불신임 당하고 지금까지 연 12년째 집권하고 있는 대처 보수당 내각이 들어선 획기적인 날이었다. 요즘 우리 국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야격돌의 현장을 보면서 그날 영국 의사당의 정권교체 현장을 지켜봤던 필자로서는 독자들과 그날의 인상을 나누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우리보다 수백년 먼저 의회민주주의를 시작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국회의 행태에서 오늘의 영국의회와 같은 행태로 언젠가는 진화하게 될 가능성은 기적같은 돌연변이 없이는 불가능하겠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만의 하나라도 우리국회의 모습이 초기의회정치가 으레 겪는 과정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정치인이 있을까 하는 기우에서 다른 나라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그날은 장장 8시간의 토론끝에 노동당내각 불신임안이 단 한표차로 통과되었다. 정권이 한표차로 바뀐 것이다. 여야 쌍방이 미리 표점검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막후에서는 군소정당의 득표작업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 긴장감 속에서도 정작 의사당 안에서는 끊임없이 부드러운 야유와 농담,그리고 웃음소리속에 토론이 엄격한 의사진행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단도직입적이고 무미건조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대처 보수당 당수가 불신임의 필연성을 역설하고 자리에 앉았을때 노동당 의석에서는 의외로 『벌써 연설을 끝내는가요? 좀 더 계속해 주시지요』라는 아우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정작 같은 패인 보수당 의석에서는 묵묵부답이었다. 그것은 연설이 워낙 시시하고 설득력이 약하니까 오래 할수록 노동당쪽이 유리하다는 뜻을 응원을 가장한 야유로 드러낸 것이다. 어느 누구도 「집어치워」나 직설적 야유는 외치지 않았다. 의사규정상 나올수도 없었다.
정작 속이 탔을 캘러헌 총리차례가 되자 그는 시종 시치미를 떼고 여야할 것 없이 모두가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농담과 위트섞인 연설을 거침없이 해냈다. 군소정당소속 의원들이 보수당의 불신임공세에 합세하고 있는 추세를 그는 이렇게 꼬집었다.
『유사이래 칠면조떼들이 크리스마스를 앞당기자는 제안에 찬성표를 던지겠다고 나선건 이번이 처음이다.』 불신임안이 가결되어 총선거를 다시하면 모두 낙선할건 너희들이라는 위트섞인 협박이었다.
연설이 끝나자 예의 군소정당소속의원은 『유사이래 처형장에 선 자가 오히려 총살대를 향해 총을 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반격을 가해 또 한차례 웃음이 터졌다.
정권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그 긴박한 토론장의 분위기 아래서,또 표결이 끝난후 노동당이 물러나게 만든 것이 겨우 한 표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진 긴장상태속에서도 단 한마디의 욕설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신기할 정도였다. 한 정권의 퇴진과 새 정권의 탄생이라는 정치투쟁의 궁극적 과정이 이처럼 순탄하게,여유있는 「대화만으로의 폭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의회정치의 성숙된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먼나라의 이야기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런 의사당의 모습,그런 정권교체의 비폭력적 방식은 먼 남의 나라 이야기여서는 안된다. 동구ㆍ남미등 오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향해 모두가 뛰고 있는 가운데서 우리도 3년째 같은 길을 뛰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면 그 가장 원초적인 조건은 말로 푸는 갈등의 해소방식을 체질화하는 것이다.
지금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의 본질은 누가 92년에 이른바 「대권」을 잡느냐를 두고 벌이고 있는 전초전이요 탐색전이다. 집권을 향해 투쟁하는 것은 정치의 본질적 속성에 속하는 것이므로 탓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방식이 지금과 같이 의회정치의 기본 절차를 짓밟는 것이라면 그것은 의회민주주의라는 「대권」의 기본바탕을 허물어뜨리는 것일 수 밖에 없다.
민주주의를 간단히 말해 야당이 여당이 될 수 있고 여당이 야당이 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제도라면 그런 비정상적 방식으로 누가 대권을 잡든 결과는 또다른 단계의 억지와 폭력의 악순환 속에 그길은 막혀버릴 것이다. 그런 대권에 국민들은 결코 권위를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며 다른 곳에서 대안을 찾으려 할 것이다.
필자는 정치인들 싸움에서 도덕성까지 기대할 생각은 없다. 그건 너무 과분한 주문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적어도 제정신을 차리고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쇼인지 격투인지 모를 난장판을 국민들이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를 자각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오래전부터 과격학생들은 제도권 전체를 싸잡아 썩었다고 판단하고 있다.
국민들이 민주개혁의 주체여야할 국회가 이런 난장판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역시 정치는 썩었고 기대할게 없다고 공감한다면 그 피해는 소야의원을 쓰러뜨리고 득의양양한 거여의원이나 쓰러진 야당의원에게 다같이 돌아갈 것이다.<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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