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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원폭 피해자의 자살기도(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역사란 언제나 강자의 편에 서 기록될 뿐인가. 망국의 역사속에서 이름없이 죽어가고 쫓겨나고 다쳤던 말못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기록은 그냥 잊혀지고 매몰될 뿐이다.
징용과 징병,그리고 정신대로 끌려가 말못할 고난과 고통으로 일생을 살았을 우리의 부모들,혹독한 추위를 무릅쓰고 강제이주를 할 수밖에 없었던 중앙아시아의 재소한인 1세들,히로시마의 원폭피해로 3대에 걸쳐 참담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원폭 피해자들….
이들 모두가 유감과 통석으로 마감되는 신고의 역사 뒤안길에서 한마디 변명조차 남기지 못한 채 역사의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부모와 본인,자식에 이르는 3대가 원폭으로 사망하거나 피폭의 피해자가 되어 평생을 참담하게 살아온 한 여인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자신의 슬픈 가족사를 자살기도로써 항변했다.
우리는 이 「작은」사건을 단순히 한 여인의 한풀이라는 시각에서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곧 우리 역사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그 아픔을 참고 견디며 살아온 우리의 이웃들에게 우리는 과연 무엇을 베풀었던가를 자성하는 계기로 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원폭피해자 보상비가 노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40억엔이 확정되었고 객지의 원혼이 된 한국인 원폭피해자 묘소를 히로시마의 평화공원 안으로 이장할 것을 약속받은 지금이다.
이맹희여인의 음독자살 사건을 계기로 다시금 원폭피해자 보상을 일본에 거론못할 바는 아니지만,오히려 우리가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우리 정부,우리 국민이 역사의 희생자가 된 이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베풀어야 할 것을 궁리해야 할 때다.
이들의 일생을 참담하게 만든 것이 가해자인 일본임은 분명하지만 그 근원적 책임은 결국 우리 선대의 못났던 위정자들에게 돌릴 수밖에 없다. 우리의 책임으로 우리의 아픔으로 되돌려서 역사의 희생자들을 우리 손으로 돌볼 수 있는 배려를 이젠 정부와 민간단체가 발벗고 나서 추진할 때라고 본다.
40억엔의 보상금 지불방식에만 머리를 짜낼 것이 아니다. 우리 경제의 규모도 커졌고 국력이 신장된 마큼 남의 나라 돈으로만 그 보상을 처리할 일이 아니다. 2만명에 달하는 피해자들을 치료하고 그들의 생계를 돌봐주는 역할을 이젠 우리 손으로 꾸려나가야 한다.
또 재소고려인협회가 소련정부를 대상으로 37년에 있었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의 진상해명과 그때 사망한 최소한 2천명이상의 우리 동포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국의 하늘밑에서 말없이 스러져간 우리 동포들의 매몰된 역사에 대한 규명과 배상이 그 또한 우리 정부,우리 단체의 뒷받침에 의해 지원되고 추진되어야 할 일이다.
한 연인의 슬픈 가족사나 40만 재소한인들의 참담했던 강제이주사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우리 역사의 상흔인 한,그 상처를 이젠 우리 손으로 치유하고 다스리는 능력과 슬기를 보여야 할 것이다.
슬픈 역사속에서 말없이 매몰된 사람들을 위로함으로써 장래의 우리 역사를 밝게 하자는 데 우리의 뜻이 모여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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