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life] 茶 따르는 소리에도 40년 內功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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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슬쩍 밀자 차(茶) 내음이 달려나와 손님을 맞는다. 세속의 찌든 냄새는 문 밖에 떨구고 들어가라는 듯하다.

오늘의 수강생인 이현정(31.경기도 고양시) 주부가 차분한 표정으로 옷매무시를 가다듬는다. 알고 보니 대기업 일본지사에서 일한 아버지를 따라 그곳 고교에 다니며 잠시 다도(茶道) 동아리 활동을 한 적이 있단다. 차향(茶香)이 시작되는 곳을 찾아 고개를 돌리자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성이 눈에 띈다. 한국차문화협회의 이귀례(74) 이사장이다.

"그래, 차맛이 어떠신지?"

찻잔을 내려 놓자 이귀례 이사장이 운을 뗀다. 말문이 콱 막힌다. 쓴맛도 아니고, 단맛도 아니고…. 이현정 주부의 옆구리를 쿡 찔러 보지만 짐짓 모른체다.

"차를 오래 마시다 보면 쓰고, 떫고, 시고, 짜고, 달콤한 다섯 가지 맛을 모두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동시에 맛본다고나 할까요."

설명을 듣고 다시 잔을 집어 드니 그런 것도 같다. 이이사장이 이야기를 계속한다.

"차는 오감(五感)을 모두 이용해 마시는 겁니다. 눈으로 차의 색을, 귀로는 물 끓는 소리를, 코로 향기를, 혀로 맛을, 손으로는 따스함을 즐기는 거지요."

이이사장은 할아버지의 차 심부름을 하며 차와 첫 인연을 맺었다. 동학운동을 했던 그의 할아버지는 손님이 찾아오면 꼭 어린 손녀에게 차를 내오도록 했다. 처음엔 '저 맛 없는 걸 왜 마실까' 했지만 점점 사람의 마음을 끄는 차의 매력에 빠져들더란다. 차가 자기 수양의 도구라는 것도 깨닫기 시작했다.

"차의 기본 정신은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데 있어요. 그래서 차는 입이 아닌 마음으로 마신다고 하지요."

그는 인천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규방다례(閨房茶禮)' 기능 보유자다. 규방다례란 양반가의 여인들이 차를 마시던 전통 예법. 절차가 엄격한 편이며, 다례 사범이 되려면 꼬박 2년을 배워야 한다. 이런 엄격한 예법을 가르치는 그이지만 입버릇처럼 "복잡한 예법보다 마음가짐이 훨씬 중요하다"고 말하곤 한다.

중국 당나라 때 고승인 조주(趙州)선사는 '어떻게 선(禪)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끽다거(喫茶去.차나 한잔 마시고 가라)'라는 화두를 던졌다. 차를 마시는 것과 마음을 닦는 일이 그만큼 통한다는 뜻일 게다.

잠자코 듣고 있던 이현정 주부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일본에서 배운 다도는 훨씬 더 형식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이이사장이 빙긋 웃더니 말을 잇는다.

"왼손바닥에 찻잔을 놓고 오른손으로 가만히 감싸서 소리나지 않게 마시세요. 머리는 가만히 두고 손만 움직여 드시고요. 다른 사람에게 찻잔을 건넬 때는 꼭 두 손으로 주셔야 합니다. 이 정도만 알아도 가정이나 각종 모임에서 예의바르게 차를 즐기는 데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는 "전통적으로 일본에서는 다도란 용어를, 우리나라에선 다례(茶禮)란 말을 많이 썼다"며 "오신 손님 반갑게 맞아 정성껏 대접하고, 가시는 손님 뒷모습이 안보일 때까지 배웅하는 정신이 우리 다례의 핵심"이라고 덧붙였다.

이이사장은 요즘 30여년간 차 문화 운동을 해온 보람을 느낄 때가 많다. 1970~80년대에는 우리 차를 마시자고 하면 촌스럽다는 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식사 후엔 꼭 커피 한잔을 해야 '문화인' 취급을 받던 때다. 양로원이나 버스정류장 같은 곳에서 공짜로 차를 나눠줘도 누구 하나 고마워하지 않았다.

"20년 전만 해도 수요가 너무 없어서 매년 우리 차 재고가 쌓여갔지요. 요즘은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군요."

이이사장이 찻주전자에 또르르 물을 따른다. 그에게 다례를 전수받고 있는 큰딸 최소연(57)씨가 "저만큼 맑은 소리를 내려면 40년은 '수련'을 해야 한다"고 귀띔한다. 옆에 앉은 이현정 주부, 입모양을 보니 '차는 마음으로 마신다'를 몇번씩 되뇌고 있는 모양이다.

김선하 기자
권혁재 전문기자

*** 이귀례씨는 …

▶1929년 전북 군산 출생

▶ 79년 한국차인회 창립 준비위원

▶ 95년 한.독 국제 차문화교류단장

▶ 96년 한.미 국제 차문화교류단장

▶ 99년 한국차문화협회 회장

▶2000년 문화훈장 보관장 서훈

▶2002년 인천시 무형문화재 11호 규방다례 기능보유자 지정

▶2003년 대한주부클럽연합회 선정 제35대 신사임당상 수상

▶현 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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