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대첩 기념비 깨지고 발해 왕궁 터는 콩밭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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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석 전면과 측면이 부분 훼손되고 글자도 지워진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 앞에 위험을 알리는 경고판이 붙어 있다. 허룽시=진세근 특파원

발해 옛 도읍지 상경용천부 안에 있는 우물터 팔보유리정(八寶琉璃井)이 군데 파손된 채 방치돼 있다.

발해 도읍지 상경용천부 옛터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이곳으로 향하는 돌계단이 오랫동안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긴 채 수풀 속에 갇혀 있다.

중국이 고구려.발해 등을 한국 고대사에서 떼어내 자국사에 왜곡 편입 중인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인해 동북 3성(만주) 일대 항일 독립운동 유적의 발굴.보존 작업이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지역의 한민족 항일 유적지가 대거 발굴돼 새로 단장될 경우 한국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중국의 계산이 작용한 결과라는 게 현지 역사학자들의 분석이다. 반면 발해를 고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강변하면서 중국이 유적을 적극 보호한다고 외부에 선전해온 것과 달리 무관심 속에 방치해온 것으로 지난주 본지의 현장답사 결과 밝혀졌다.

◆ 중국 간섭 심해져=헤이룽장(黑龍江)성 하이린(海林)시에는 지난해 10월 5000평 규모의 '한중우의(韓中友誼)공원'이 완공됐다. 이 공원은 당초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 기념관'으로 조성 공사가 추진됐으나 중국 정부의 반대 때문에 전혀 엉뚱한 이름을 달고 말았다. 완공 뒤 1년 가까이 지난 최근까지도 공원 단장이 지지부진하다. 전시물 하나까지 중국 측의 간섭과 감시가 심하기 때문이다. 하이린시에서 약 10㎞ 떨어진 산스(山市)현에 위치한 김좌진 장군 순국 장소는 중국 측이 지금도 출입자를 감시할 정도다.

지린(吉林)성 룽징(龍井)에서 만난 한 중국동포 역사학자는 이에 대해 "고구려.발해 등 고대사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사까지 동북공정이 압박하고 있다"며 "새로운 독립 유적지 발굴뿐 아니라 기존 유적을 단장하고 보수하는 일조차 간섭과 제약이 심해지는 추세"라고 전했다.

지린성 허룽(和龍)시 푸싱(富興)향 청산리에 있는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는 현재 상석 좌측면 5~6m와 전면 10여m가 훼손됐다. 경계석은 거의 절반 이상이 무너져내렸다. 상석에 쓰인 '기념비'란 세 글자는 지워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중국 측의 견제에 우리 측의 무관심이 맞물린 결과로 보인다. 국내 민간 참관단이 '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의 훼손 실태를 처음 보고한 것은 지난해 8월이다. 그러나 이번 취재 결과 훼손 상태가 그때보다 더 심해졌다. 석비의 상부에서 돌조각이 떨어질 정도여서 기념비로 올라가는 계단에 '위험한 곳이니 가까이 가지 말라'고 쓰인 경고판이 들어섰을 정도다.

하이린시에서 50여㎞ 떨어진 산스현 신싱(新興)촌 김좌진 장군의 옛 묘소 옆에는 '김좌진 장군 묘지 옛터(金佐鎭將軍墓地遺址)'란 푯말이 땅바닥에 쓰러진 채 풀숲에 가려져 있었다.

◆ 폐허가 된 왕궁터=발해 유적도 방치돼 폐허로 전락하긴 마찬가지였다. 최근 중국 정부가 대대적인 발굴을 발표한 헤이룽장성의 발해 왕궁이 있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 곳곳에는 콩이 재배되고 있었다. 대조영이 일군 해동성국(海東盛國)의 영광이 콩밭으로 둔갑해 버린 현장이다.

그러나 정작 놀랄 일은 그 다음부터다. 유적 터 여기저기에 공사판 석재와 비석.우물 등 유적들이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특히 발해 왕조의 우물 팔보유리정(八寶琉璃井)은 우물 벽 주변과 계단, 울타리가 군데군데 부서졌다. 지붕도 상당 부분 파손됐다. 5월 새 유적발굴지라고 발표된 우물 뒤쪽의 발굴 현장은 땅만 파헤쳐져 있을 뿐 벌써 몇 개월째 내팽개쳐진 상태다.

지린성 허룽(和龍)시 외곽에 룽하이(龍海)촌이 있다. 이 마을의 샛길엔 차가 들어갈 수 없다. 걸어서 20분쯤 올라가면 비석 하나가 야산의 풀숲에 숨어 있다. 뭉개진 글씨를 어렵사리 판독하고 보니 '정효공주(貞孝公主)'였다. 정효공주는 발해 제3대 문왕의 넷째 딸이다. 산길을 더 걸어 올라가면 정효공주 무덤이 나온다. 그러나 무덤은 창고처럼 지어진 건물에 갇힌 채 숨도 못 쉬고 있다. 창고 정문을 채운 자물쇠엔 녹이 슬어 있었다. 몇 년간 한 번도 이 문을 열지 않았다는 사실을 짐작케 했다.

룽하이촌 서쪽으로 가면 옛 신작로 가에 발해 서고성(西古城) 유적이 나온다. 길을 따라 길게 토성 흔적이 남아 있다. 발해 문왕 때 13년간 수도 역할을 했던 곳이다. 그러나 현재 토성은 그냥 흙더미처럼 방치돼 있다.

지린성 둔화(敦化)시 외곽 육정산(六頂山) 기슭에서 산 안으로 난 비포장 도로를 따라 30분쯤 걸어 올라가니 왼쪽 호수에서 낚시가 한창이었다. 호수 맞은편에 자리 잡은 곳이 육정산 고분군으로 발해 무덤 80여 기가 분포돼 있다. 그러나 고분의 철제 정문은 굳게 닫혀 있다. 주민 양쿠이(楊魁)씨는 "벌써 몇 년째 문이 닫혀 있다"고 말했다. 철문 주변에는 사람 키보다 높게 자란 잡풀이 철문과 담을 에워싸고 있고 담장 안쪽에는 쓰레기가 잔뜩 던져져 있다.

고구려 유적도 처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린성 지안(集安)에 있는 고구려 옛도읍 국내성(國內城) 유적지에는 토성 20여m만 남아 있고, 그나마 주택가 옆 길가에 방치돼 있었다.

사정이 이런 데도 한국 정부의 대응은 미온적이다. 선양(瀋陽) 총영사관 관계자는 "7월 초 청와대로부터 해외 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자료의 목록과 관리 상태를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난달 24일부터 나흘간 윈난(雲南)성 쿤밍에서 한국 정부가 개최한 '2006년 중국 내 (한국)유적지 관계자 연석회의'는 전혀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국가보훈처 관계자 1명, 독립기념관 직원 4명 등을 제외하곤 참석자 대부분이 각 유적지의 중국인 관리인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동북 3성(중국)=진세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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