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칼럼

블레어 정권 10년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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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면 정치무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세계 곳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는 총리가 가고 대통령도 떠나며 이어 새 총리가 오고 새 대통령이 취임한다는 이야기들이다. 이처럼 변화무쌍한 정치무대에서 1막 1장씩 연출하는 정치 지도자의 역사적 위치는 지금이 아닌 후세에 가서야 자리 매김이 확실해질 것이다.

다만 물러나는 지도자의 치적이나 행적을 바로 뒤미처 되살펴 보는 것은 같은 시대에 활동하고 있는 현역 정치인들에게 스스로의 위치와 자세를 검증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기 위함이다. 비교적 성공적으로 10년 집권을 마감하면서 머지않아 정계를 떠나겠다고 선언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바로 그러한 경우다.

첫째, 블레어가 이끈 영국은 지난 10년 동안에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루는 데 성공하였다. 선진경제에서 보기 드문 3%의 성장을 거듭해 왔으며, 무엇보다 완전고용에 가까운 일자리 창출에 성공하였다. 영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은 런던을 비롯한 중소도시의 건물이나 도로가 한결같이 깨끗해졌음을 곧바로 발견하게 된다. 런던증권거래소가 뉴욕증권거래소를 상장기업 수에서 앞지르게 된 것은 금융대국으로서 영국의 위치가 튼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런던이 2012년 올림픽 개최도시로 선정된 것도 영국경제의 호황을 반영하고 있다.

둘째, 이러한 영국경제의 발전이 민주사회주의자인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 치하에서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블레어를 마치 보수당 총리인 듯 착각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그것은 그가 구시대적 혹은 고전적 사회주의의 틀로부터 과감히 탈피하여 정보화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노동당으로 개조하는 데 성공하였음을 간과한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사회정의라는 목표는 굳건히 지켜가면서 이의 실현을 위한 방법과 정책은 새 시대의 요건에 부응하여 새롭게 개발해야 된다는 것이 블레어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세제를 비롯한 정부의 규제에 의존하기보다는 인간의 창의성을 자유롭게 발휘시키는 데 중점을 둔 새로운 사회 및 경제정책의 추구가 민주사회주의의 나아갈 길이라는 것이다.

셋째, 좌와 우가 대립하는 이념의 시대는 지나갔고 개방과 폐쇄 사이의 선택만이 모든 국가가 당면한 오늘의 기본과제라고 블레어는 역설하면서 영국을 개방사회의 기수로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보호주의.고립주의.민족주의를 앞세우는 폐쇄사회는 역사의 흐름을 되돌릴 수 있다거나 불가피한 선택도 우회할 수 있다는 망상에 얽매여 속수무책으로 표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이렇듯 개방과 폐쇄라는 기준으로 세상을 둘로 나눈 블레어의 입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녔음이 틀림없지만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중동사태와 연계되어 심각한 부정적인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집권 10년에 걸친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블레어 총리의 국민적 인기가 근년에 들어 계속 하락한 가장 큰 원인도 바로 이라크에서의 고전과 영.미 동맹관계, 특히 부시-블레어의 특별한 협조관계에 대한 부정적 반응의 확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사실 제국주의 시대에 중동을 마음대로 요리하였던 영국이 그 축적된 경험과 지식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전쟁과 같은 불확실한 모험에 동참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그러나 9.11사태의 충격 속에서 미국과의 특수한 동맹관계를 재확인해야 되는 상황적 긴박성과 폐쇄사회의 공격으로부터 개방사회를 지켜가겠다는 규범적 사명감이 포개지면서 블레어는 나름대로 확실한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왕년의 대영제국이 누렸던 영광이나 국민의 자존심은 접어두고 오늘의 영국이 초강대국 미국과의 특수 동맹관계를 유지하여 유럽의 안전과 평화를 담보하겠다는 블레어의 고심과 노력은 좀 더 조심스럽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어쨌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아무리 성공적인 지도자라도 집권 10년이면 물러날 때가 됨을 블레어 총리 스스로 보여준 셈이 되었다. 그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느냐 하는 것은 물론 정치인 각자의 몫이리라.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 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