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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과잉 미디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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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현대 미디어는 날로 폭주하고 있다. 연일 뉴미디어들이 쏟아지고 일상을 포박하는 힘도 강화된다. 집 밖의 미디어를 뜻하는 'OOH(Out Of Home)' 미디어 환경은 더 이상 새로운 용어가 아니다. 모바일, 무선 인터넷은 기본이다. 길거리.지하철.공중화장실에서 자판기나 할인점 계산대에 설치된 TV들은 쉼없는 영상을 쏘아 댄다.

미디어 과포화의 결과는 '정보와 자극의 과잉'이다. "현재 사람들이 한 주간 보는 드라마 양이 이전 사람들이 일생에 걸쳐 봤던 것보다 더 많다"는 말(레이먼드 윌리엄스)이 새삼스러울 정도다. 개별 미디어들도 과잉을 지향한다. 방송 중 화면 하단에 '부가 정보 자막'을 계속 내보내는 TV가 그렇다. 수용자 역시 더 많은 자극을 원한다. 휴대전화를 신체의 일부로 삼아 24시간 놀이에 길든 '디지털 키드'들은 한시라도 이 장난감을 떼놓지 못한다. 이들에게 자극.재미.오락거리가 없음은 '재난'이다.

미디어학자 토드 기틀린은 '무한미디어'에서 미디어가 제공하는 '감정의 과잉'에 주목한다. 미디어 과포화를 비판하는 그는 "더 큰 문제는 미디어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되는 감정들을 급류처럼 쏟아부으며, 우리의 삶을 불필요한 포화 상태로 몰고 가는 것"이라고 썼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시청자가 원하는 것 또한 '감각적 만족'이다. "9. 11테러 사건에서도 사람들은 단지 사실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포와 슬픔.연민.안심 같은 감정을 느끼려고 TV를 시청했다."('무한미디어')

기틀린에 따르면 감정의 사회학적 의미에 가장 먼저 주목한 이는 사회학자 게오르크 지멜이다. 그는 모든 것이 화폐가치로 전환되는 시장경제의 출현이 사회 전반에 냉소와 무감동을 퍼뜨렸지만 그만큼 인위적인 자극과 흥분이 더욱 필요해질 것이라 예측했다.

기틀린은 "시장적 사고가 급증하던 18세기에 정반대로 내밀한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는 낭만주의가 태동했다. …계산의 시대인 근대는 감정에 헌신하는 문화를 만들어냈다"고 썼다. 그가 주목한 감정은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일회용이다. 실제 삶과 상관없는 가짜 감정이다.

과잉 미디어가 쏟아내는 과잉 자극에 취해 감정 과잉상태로 살아가지만, 알고 보면 진짜 내 감정은 아니라는 얘기다. 삶의 경험이 곧 미디어 경험인 '미디어 시대', 이 가짜 감정에서 벗어날 길은 쉽지 않아 보인다. 기틀린의 통찰이 흥미로우면서도 우울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