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간 닫힌 대륙빗장 열었다/이등휘총통 「3불정책」포기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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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란」규정 폐기… 민주정치구현/북경 대응태도가 성패 변수로
20일 공표된 리덩후이(이등휘) 대만총통의 취임사는 대외적으로는 「3불정책」의 포기,대내적으로는 정치민주화 일정의 구체화 등 두가지로 요약된다.
이등휘총통이 북경정부가 대만에 대해 무력사용만 포기한다면 문화ㆍ학술ㆍ경제교역은 물론 과학기술까지도 제공하는 등 모든 대본토 문호를 전면 개방하겠다고 천명한 것은 본토체제에 대한 대만의 우월성과 자신감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본토와 대만이 「공모」해 평화적이고도 민주적인 방식으로 「통일국가」를 이룩하자고 제의한 것은 중국공산당과는 어떠한 접촉도,협상도,담판도 하지않겠다는 국민당 정부의 지금까지의 「3불정책」을 공식으로 포기했음을 의미한다.
이총통이 본토에 대해 이같은 「과감한」제의를 한데는 최근 소련 및 동유럽사회주의 국가들의 잇단 공산당 일당독재의 포기와 시장경제체제 도입 등의 시대적 조류에 편승,본토에 대한 압력과 함께 외교적으로 고립돼 있는 대만의 국제적 위상을 격상시키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다.
지난 49년 대만천도 이래 국민당정부가 고집해온 「3불」의 대륙정책은 사실상 지난 87년11월 무너지기 시작했다. 38년만에 처음으로 친지방문을 위한 대만인의 대륙방문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이후 대만은 88년8월 행정원 산하에 대륙공작회보를 설립,대륙정책에 관한 업무를 총괄케 했으며 이해 11월에는 본토주민들에게도 친지문병과 장례식 참석을 위한 대만방문을 허용했다.
이와 함께 지난 8일에는 입법위원(국회의원) 6명을 북경 공산당정부와 무역사무소 설치를 위한 협상대표로 파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3불정책에 역행,이를 포기하게한 주역들은 대만의 기업인들이다.
이총통의 대륙 및 대외정책자문인 마잉지우(마영구) 행정원 연고회위원장마저도 『기업인들은 장사가 되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게 아니냐』고 말할 정도로 기업인들의 역할이 정책변화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통취임사를 통해서야 뒤늦게 이를 공표한 것은 대만출신인 이총통이 앞으로 6년간의 임기중 닥칠 통일에 대한 대내적인 「아래로 부터의」압력과 본토출신의 당내 보수원로들의 견제 등 이중의 부담을 사전봉쇄,자신의 입지를 보다 확고히 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바로 헌법개정을 통한 민주화 일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점이다.
이총통은 대만의 상황을 「내란상태」로 규정,거의 모든 분야에서 제한투성이인 현행헌법이 「시대상황」에 걸맞지 않다고 전제,이의 개정을 향후 2년내에 마무리짓겠다고 약속했다.
그동안 대만은 1인당 GNP가 7천5백달러(89년말 현재)에 이르는등 경제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후진성」을 면치못했던게 사실이다.
이에 대해 전적인 책임이 있는 집권 국민당은 다당제가 보장된 가운데 실시된 지난해 11월의 입법위원 및 지자체 의회선거에서 평균 60%의 지지를 얻었다. 그렇지만 민진당을 포함한 야당에 대한 지지율도 30%를 육박,내심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로라면 머지않아 국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불안에 싸인 상태다.
다시 말해 국민당정부는 정치적으로 다소 「개방」을 하더라도 앞으로 ▲사회간접시설에 대한 투자확대 ▲사회보장제도의 확립 ▲환경보존 ▲공해방지 ▲교통ㆍ치안ㆍ거주조건의 개선 등을 통해 지지기반을 더욱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총통이 일부 지식인층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군출신인 하오바이춘(학백촌) 국방부장을 행정원장(총리)에 굳이 앉히려하고 있는 것도 「안정」확보를 위한 포석인 셈이다.
이번 이총통의 정치민주화 일정발표로 학행정원장의 임명을 극력 반대하는 지식인층의 반발이 수그러들지,아니면 더욱 거세질지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
이와 함께 북경 정부가 「1국가 2정부」의 대만주장과 통일논의를 경제협조라는 현실적 필요 때문에 수용하게 될지의 여부도 역시 미지수여서 앞으로의 사태추이가 주목되고 있다.【대북=이춘성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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