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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퇴계학·도산시의 본산 안동 「강산서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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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하늘이 푸르다 하나 구름 낀 날이 많고 강물이 맑아도 물결에 흔들리게 마련이다. 이 나라의 역사에 그 이름이 높은 고학대덕들이 빽빽하지만 임금을 섬기는 가운데서, 혹은 시대적 어둠에 갇혀서 당대에는 훼예(훼예)와 모멸, 무고와 유형 속에서 불행을 겪지 않은 이가 드물다. 그러나 여기 드높은 향기로만 채운 티 없이 맑고 푸른 한 분이 있다.
퇴계 이황은 이 나라의 독창적 학문을 이룩한 큰 학자요 성인이며 당대에나 후대에나 학덕과 인망에 있어 견줄 이가 없는 오직 한 분이다. 퇴계는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유학의 사상적 체계를 새롭게 정립했을 뿐 아니라 사상과 실천을 일치시킨 실천적 지식인으로 더욱 높이 평가받고 있다.
도산서원은 퇴계의 학문과 시(문학)를 완성시킨 퇴계학·도산시의 대본산이며 조선조에 와서 본격적인 서당교육·서당학풍을 일으킨 발상지이기도 하다.

<서당학풍 발상지 사적 170호로>
안동시에서 동북쪽으로 7O리쯤 가면 낙동강상류 영지산기슭에 도산서원의 기와지붕들이 추녀를 맞대고 들어앉아 있다. 안동군 도산면 토계1동680 약10만평의 땅이 사적170호로 지정되어 있고 30채의 기와집이 이 나라의 상징적인 철인이며 시인인 퇴계의 옛 자취를 가지런히 지키고 있다.
뒷날 퇴계가 이 곳의 집과 경관18절을 읊은 『도산잡영』의 앞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영지산 한 가닥이 동으로 흘러 도산이 되었다. 이 산이 두 번째라 해서 도산(또산)이라고 했다고도 하고 질그릇가마가 있어서 도산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고 도산의 유래를 밝히고 있어 바로 이 서원을 에워싼 나지막한 산 이름이 도산이고 지금 지명이 「도산면」 으로 된 것도 산의 이름에서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의 지형은 동취병과 서취병이 마주 보면서 남으로 굽어내려 8, 9리쯤에서 동은 서로, 서는 동으로 넓고 아득한 들에서 만난다. 산 뒤의 물은 퇴계라 하고 남쪽의 물은 낙천이라 한다」고 씌어 있어 그의 호가 바로 도산의 뒤에 흐르는 냇물의 이름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실천적인 지식인 큰 제자만 3백명>
퇴계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1557년이었고 도산서당이 준공된 것은 1560년이었으니 그의 나이 60세 때였다. 이곳에서 퇴계학이라는 새 학문의 대산맥을 이루는 3백을 헤아리는 큰 제자들을 가르쳤다.
노수신·유설춘·박순·조목·정탁·기대승·성혼·김계일 등 어느 누구 하나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지 않은 이가 없고 벼슬로 당상에 오르지 않은 이가 없다.
퇴계의 학문적 업적을 누가 다 헤아리랴. 그의 주요 저서로 추계집 59권·주자서절요· 계몽전의·사서석의 등이 안개처럼 흐려있는 동양사상의 진수를 맑은 거울처럼 닦아낸, 것이요 「진성학십도차」는 그의 사상의 절정으로 68세에 그를 흠모하는 명종에게 온축(온축)을 다해 완성한 작품이다.

<우리 정서에 맞는 시편 수천수 남겨>
그는 학문과 더불어 시를 짓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기울였다. 많은 시들이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씌어진 것들로 한문으로 쓴 시만 해도 2천수가 넘는다. 또한 도산12곡은 시조의 역사상 그 제작연대가 밝혀진 최초의 작품이며 그가 이 밖에 퇴계가·금보가·상저가 등 한글로 시를 썼다는 점은 그의 주체적 문학사상을 입증하는 것의 하나다.
『이제 노래를 부른다면 세상에 쓰는 말로 지어야 할 것이니 그것은 나라풍속의 소리마디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도산12곡을 쓴 동기를 밝히고 있어 그가 백성들에 널리 불릴 수 있는 시를 쓰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시를 도락으로보다는 정신과 마음을 밝히는 자연과 사물의 관조, 그리고 사상적 메시지로서 썼거니와 특히 도산을 소재로 한 시가 많아서 필자는 그의 시를 도산시로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것이다.
도산에서 쓴 수많은 시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그의 사상의 깊이가 없는 시가 없다. 그 한편을 여기 옮겨본다.
〈도산에 사는 뜻은〉
내 기쁘구나
글공부할 집이 저렇듯 지어지고
산골에 살면서도
허리구부려 밭가는 일하지 않게 되었구나
옛 집의 책 모두 옮겨놓고
대나무를 심어 새 순을 보는구나
샘물소리 밤의 고요를 흔들어도
내 깨닫지 못하고 맑게 갠 아침
산빛 더욱 곱구나
아는 때가 있으리라
예부터 산에 사는 선비세상일 모두 잊고
이름을 감추고 사는 까닭을.
글에 나타난 바대로 도산서당을 짓고 나서 그 기쁨과 스스로의 생각을 밝힌 시다. 이 시의 핵심은 「이름을 감추고 사는 까닭 에 있는데, 퇴계는 평생토록 이것을 지키느라 참으로 힘들게 살았던 것이다.

<평생 숨어 살려고 관직 사퇴만 79회>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벼슬길에 오르고자 공부를 하고 권력을 좇아다니고 남을 해치는. 일이 다반사인데 퇴계는 어떻게 하면 서슬 퍼런 임금의 뜻을 물리치고 내리는 벼슬을 뿌리칠 것인가에 참으로 고통스러워했다.
그가 71세로 세상을 마치기까지 약90종의 관직을 1백50여회에 걸쳐 임명받았으며 사퇴를 계청(계청)한 것만도 79회가 된다. 학자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홍문관·춘추관 양관 대제학에 올랐으나 그에게는 번거롭고 몸에 맞지 않는 자리일 뿐이었다.
임금에게 올린 글(계, 차, 청주, 소)들은 대개 벼슬을 거절하는 내용으로 그 핑계는 헛된 이름(허명)과 둔하고 못났음(노열)을 들고 있다.
퇴계를 흠모하다 못해 명종 임금은 세상을 떠나기 한해 전 송인을 시켜 도산서당의 풍경을 그려오게 하고 『도산기』와 『도산잡영』을 써서 병풍을 만들어 머리맡에 두고 보았으니 당대에 그 이름 높음이 어떠했겠는가

<「한국의 주자」 평가 영원한 사표 숭앙>
도산서원은 퇴계가 세상을 뜬지 4년 뒤에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 의해 서당 위쪽에 새로 짓게 되고 선조는 명필 석봉 한호의 글씨를 사액으로 내려준다.
정조는 퇴계의 학덕을 숭상하는 나머지 멀리 도산서원에 가서 과거를 보게 하였다. 그 자리에 기념비를 세운 시사단이 서 있었고 지금은 도산서원 마당 앞 강반에 높이 서서 그 옛날의 영화를 뽐내고있다.
중국의 학자 왕소은 「한국에 퇴계가 있는 것은 중국에 주자가 있는 것과 같다」고 거침없이 평가했다.
일본의 근대학문이 퇴계학으로부터 눈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퇴계는 학문으로 따를 수 없이 높고, 시로 비길 데 없이 고결하다. 그는 매화를 즐겨 시로 썼거니와 만대에 썩지 않는 향기를 전하고 있으니 일세의 사표가 아니라 백세의 사표로 우러러도 다함이 없을 것이다. 모란꽃 지는 늦은 봄 도산일경을 그려본다.
〈사진 최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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