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재현칼럼

빛도 때로는 폭력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분명히 내가 과민한 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기도 일산이 집이라서 자유로는 익숙한 길이다. 서울에서 자유로를 타고 가다 보면 장항 인터체인지를 2㎞가량 앞둔 지점의 길 한복판에 대형 전광판이 설치돼 있다. 요즘 이 전광판에서는 고양현대미술제.e-러닝 국제박람회.2006 한브랜드 박람회.제19회 고양행주문화제를 홍보하는 문구를 번갈아 내보내고 있다. 전광판의 위치상 자유로를 오가는 모든 운전자가 안 보려야 안 볼 수 없게 돼 있다. 문제는 빨강.노랑.초록색으로 구성된 글자들의 천박한 분위기다. 모양이나 빛깔이 너무 튀고 원색적이어서 싸구려라는 느낌이 확 든다. 저런 색상과 디자인 감각으로 무슨 '현대미술'을 홍보하고 '문화'를 알리겠다는 것인지 볼 때마다 한심하다.

자유로의 전광판뿐일까. 서울역에서 한강대교 방향으로 가다가 삼각지 교차로에 이르면 서울지방보훈청 건물에 설치된 전광글자판이 기다리고 있다. 밤에 그 전광판을 한번 쳐다보라. '함께하는 보훈 하나되는 국민' 등 표어 글자의 빛이 너무 강렬하고 자극적이어서 갖고 있던 보훈정신마저 훼손될 지경이다. 서울역 신청사 왼편에 솟아 있는 동영상 전광광고판은 또 어떤가. 지나치게 휘황하다. 서울역을 이용하는 수많은 시민에게 이런 광고판은 폭력에 가까운 빛의 공해다. 옥탑방처럼 조금 높은 곳에서 서울의 밤을 내려다보면 수많은 교회 십자가가 빨갛게 빛나고 있다. 기독교인들께 양해를 구하며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좀 더 경건한 방식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외국에서 생활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밤에 자동차 전조등이 잠시 자기 집 쪽을 비쳐도 정색을 하고 항의한다는 사실을. 그런데 우리 사회는 과도한 빛의 폭력성에 너무 둔감하다. 모두의 소중한 자산인 어두운 밤하늘에 대고 멋대로 서치라이트를 쏘아대고, 유흥가 나이트클럽을 방불케 하는 현란한 조명들이 건물 옥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조명디자인 전문가인 정강화(건국대 디자인학부) 교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도시의 조명을 공공재(public resource)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너무 밝거나 불필요한 곳으로 비치거나 밤하늘로 산란하는 빛은 광공해(light pollution)에 불과하다. 정 교수는 최근 서울 명동 롯데백화점 전광광고판의 밝기를 쟀다. 광고판의 색깔 중 흰색은 3283니트(nit.밝은 정도를 나타내는 단위), 푸른색은 911.2니트나 됐다. 적정한 밝기의 10배다.

울긋불긋한 한강다리들도 문제다. 서울시는 얼마 전 '한강교량 야간 경관 조명시설 현황 조사보고서'를 펴냈다. 정강화 교수 등 전문가 여덟 명이 지난해 3월부터 9개월간 현장을 뛰어다니며 조사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대상인 한강다리 16개 중 조명 상태가 비교적 괜찮아 '현상 유지' 판정을 받은 것은 신행주대교와 청담대교뿐이었다. 투광기로 쏘는 빛이 지나치게 밝아 다리와 한강둔치를 찾는 시민들에게 해롭다고 판정된 성산대교, 투광 방향이 잘못된 원효대교, 색깔이 조화를 잃은 한강대교는 '대폭 수정'을 요구받았다(나머지는 부분 수정). 서울시가 내년에 18억원을 들여 이 세 곳의 조명부터 바로잡는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도시의 조명에는 절제와 타인에 대한 배려가 깃들어 있어야 한다. 혹시 여야 정치인부터 대법원장까지 온통 튀는 발언들을 일삼으니 국민들도 잔칫날이나 환락가에나 어울릴 법한 강렬한 빛 세례에 둔감해진 건 아닐까. 지자체들도 전광판의 밝기 규제에 무심하다. 기껏해야 '운전자 또는 보행자 등에게 장애를 주지 않아야 하며 생활환경을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는 두루뭉수리한 조례를 두고 있을 뿐이다(자유로의 전광판은 경기도와 고양시의 작품이다). 1989년부터 5년간 시 예산의 1.5%를 야경 연출 사업에 투자해 격조 높은 '밤의 도시'를 만든 프랑스 리옹, 인기 대중가요의 제목에 착안해 이미 20년 전에 도시 야경을 예술품처럼 꾸민 일본 요코하마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계획 같은 사례를 우리라고 못 해내라는 법이 없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