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대책 발표만 하면 두세 달은 그냥 개점휴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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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숙씨(왼쪽)가 오랜만에 매물을 보러온 고객에게 아파트를 보여준 뒤 주변 환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인숙(50)씨가 서울 경동시장에서 약재상을 운영하던 박경환(53)씨와 결혼한 때는 1978년. 먹고사는 데는 큰 불편 없이 지내던 이들 부부에게도 98년 외환위기의 폭풍은 비켜가지 않았다. 가세가 기울면서 유씨는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가 됐다. 마침 수많은 실직자가 부동산중개업에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고는 넉 달 동안의 도전. 합격증을 쥔 유씨는 99년부터 서울 창동의 중개업소에서 일을 배웠고, 2001년에는 상계동에 사무실을 열었다. 이듬해 집값 대란의 진원지인 강남(서초동)에 권리금 6000만원을 주고 남편과 함께 '굿모닝 부동산' 상호로 둥지를 틀었는데….

■ 3.30대책 뿌연 황사 …시야 흐린 봄
거래 뚝 … 가게 전화 울리지 않고

올해 초 이들 부부로부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은 취재팀은 4월 2일 다시 만났다. 그래도 겨울 동안 부부의 표정은 부동산중개업소 이름처럼 '굿모닝'이었는데, 이날 취재팀을 대한 모습은 그게 아니었다. 잔뜩 굳어진 얼굴로 "이제 당분간 노는 일만 남았다"고 했다. 부부의 허탈해하는 표정을 보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라는 질문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한탄했다. "항상 그렇거든요. 정부 정책발표가 나오면 두세 달은 노는 게 관행처럼 돼버렸습니다." 사흘 전인 3월 30일 재건축 개발이익 환수를 뼈대로 한 이른바 '3.30 대책'을 원망하는 하소연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후부터 굿모닝 부동산의 전화는 울릴 줄을 몰랐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남편 박씨는 혈압이 확 올라 있었다. 오래간만에 단독으로 확보한 매물 아파트를 인근 부동산중개업자가 박씨 몰래 가로챈 것. 박씨는 "더 좋은 가격을 쳐주겠다는데 마다할 집주인이 어디 있겠나. 매물이 귀하다 보니 상도덕이 엉망이 됐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인근 상가에 14개의 부동산 중개업소가 몰려 있습니다. 경쟁이 워낙 치열하니 중개업자들끼리 주먹다짐까지 벌여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지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상가 주인은 부동산업소의 월세를 110만원에서 150만원으로 40만원이나 올려 달라고 통보했다. "다른 지역으로 옮겨볼까도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권리금 6000만원을 못 챙길 것 같아 계속 있기로 했습니다." 박씨 부부는 결국 20만원만 더 올려주기로 상가 주인과 합의했다.

■ 5·15 버블세븐 꽁꽁 언 여름
양도세 피해 위장이혼까지

5월 15일 '청와대 브리핑'에 이색 발표가 난 뒤 초여름에 만난 박씨 부부는 초죽음이 됐다. 청와대는 집값 급등 지역으로 강남.서초.송파.목동.분당.평촌.용인 등 7곳을 지목하곤 이 지역을 '버블 세븐'이라 불렀다. "3.30 대책 영향의 어려움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두 건의 전세 거래를 따냈는데…." 이 일대 부동산 업자들은 이 발표를 '5월의 한파'라고 불렀다. 마침 굿모닝 부동산에 들른 한 노인은 자신이 집을 팔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옆집 사는 친구가 1가구 2주택 상황에서 10년 동안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25평 아파트를 4억9000만원에 팔았더니 양도소득세로 8000만원 넘게 납부했어. 세금 내고 나니까 남는 게 없더라고. 난 33평 아파트 한 채를 따로 갖고 있는데, 이거 안 팔 거야. 2년만 버티면 정부도 바뀔 거고 그러면 상황이 나아지지 않겠어?"

물론 이 노인의 경우처럼 강남엔 여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강남 사람들이라고 모두 부자는 아닐 터. 소형 전세를 찾는 서민들은 발만 동동 굴렀고, 정작 자신들이 서민인 박씨 부부가 또 다른 일을 찾은 것도 이때였다. 부동산 중개업만으론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부부는 다단계 업체를 찾았다. 부부는 그래도 본업인 부동산 중개 일하랴, 다단계 판매업 하랴 정신 없는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부동산 대란은 인심마저 흉흉하게 만들었다. "1가구 2주택을 가진 부부가 양도세를 피하기 위해 위장이혼까지 합니다. 주택을 팔고는 다시 합치는데…세금 줄이려고 거짓 이혼까지 해야 하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을까요."

■ 전세난 절박한 서민의 가을
전세 재계약 "5500만원 올려달라"

9월 13일. 정부의 전셋값 상승률 발표가 나왔다. 올 1월 대비 8월의 전셋값 상승률은 서울 강서구가 9.4%로 전국 2.9%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강남 일대 부동산업자들은 "9월 들어 강남 전셋값도 가파른 상승세"라고 말했다.

박씨 부부에게는 전세 고객들의 요구가 이어졌지만 물건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제발 집주인 좀 구슬려 보라"는 하소연을 묵묵히 듣는 것 외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박씨 부부의 귀에는 강남 이외의 전세난 소식도 들렸다. 서울 쌍문동에 사는 김모씨. "10월 출산 예정인 만삭의 아내를 위해 약간 넓은 곳으로 전셋집을 옮기려고 동분서주했으나 쌍문동 일대에 아파트는 물론 빌라 매물도 없었습니다. 간신히 알아본 집의 전셋값은 한 달도 안돼 2000만원이나 올랐어요." 그는 결국 경기도 의정부로 이사했다. 서울 당산동 32평 아파트를 1억6000만원에 전세 살고 있는 이모씨는 집주인이 무려 5500만원이나 올려 달라는 요구에 경악했다. 홀어머니의 항암제 약값만 한 달에 200만원이나 들어가는 상황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다.

박경환씨 부부는 20년 전 알뜰히 절약하며 제기동 연립주택을 3800만원에 구입했다. 연립주택은 인기가 없지만 자신들은 그래도 3억원은 될 것으로 생각한다. 8억원을 넘나드는 40평형 판교 아파트 분양가와 평당 1100만원이 넘는 은평 뉴타운 분양가를 보며 박씨 부부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 특별취재팀: 경제부문=정선구.이현상.심재우.김필규.임미진 기자,
사진 부문=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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