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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할 사람은 누구인가/장두성(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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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요즘 시정에 귀를 기울여보면 청와대는 도대체 무얼하고 있느냐는 불평을 자주 듣게된다. 물의를 빚고있는 김영삼ㆍ박철언 양씨의 분란이 마치 어른없는 집안의 법도없는 난장판처럼 확대되어 보이는 것도 이 사건 하나만 보고 나오는 반응이 아닌것 같다.
이에앞서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여러 정책에서부터 국정의 방향을 가늠하게하는 중요결정들에 이르기까지 청와대는 행정부와 여당의 사령탑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하거나 안하고 있다는 의구심이 쌓여왔다.
국민들은 5공청산의 마무리를 미흡한대로 받아들이고 느닷없이 3당통합이 발표됐을때도 그런대로 50% 안팎으로 수긍을 해줬다. 이런 변화를 지지해준 사람들은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6공정부가 과거의 족쇄에 얽매이고 여소야대의 정치판도 안에서는 제대로 국정을 펴나가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니까 5공청산이나 거여의 출현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국정이 정상궤도를 되찾기위해 불가피했던 수단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장애물들이 걷힌 후에는 통합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이에 대한 국민여론의 지지폭을 넓힐 확고한 비전과 국정프로그램을 보여줘야 할게 아닌가. 그런 기대가 이들 조치를 지지했거나 마지못해 수긍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번져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어쩐일인지 정부와 여당은 장애물을 벗어나기 전이나 후나 별다름없이 스스로의 발에 걸려 휘청거리는 모습만 보이고 있다.
정호용씨의 후보사퇴를 둘러싼 잡음이나 문희갑후보 당선에 민자당의 온 위신을 건 결과는 모두 여권 스스로가 저지른 자충수에 지나지 않는다. 일개 지역선거를 통해 합당의 정당성을 확인하려던 생각 자체가 너무나 옹졸했고 이때문에 민자당은 필요 이상으로 상처를 입었다.
김ㆍ박 양씨의 권력싸움의 시발점이 된 모스크바의 추태도 따지고 보면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낳은 한 증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소련과의 수교와 같은 지극히 중요하고 민감한 대사를 도모할때는 엄격한 지침과 역할분담,그리고 면밀한 계획을 준비하는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그동안의 과정을 보면 그런 사전준비는 커녕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고 있었고 외교보다는 국내에서의 점수따기 경쟁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두 당사자들의 행동이 치졸한 것을 나무라기 전에 이 대사의 사령탑이 무얼하고 있었는지를 점검해 봐야 될것이다. 동행이니 수행이니 하고 마찰이 처음 시작됐을때 청와대쪽에서 확고한 교통정리를 했더라면 이 문제가 이지경으로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책임제 아래서 대통령은 국정의 주요 사안에 대한 최고 결정권자다. 부처간ㆍ당직자간에 이견이 있어 정책결정이 늦어질때 이를 조정하고 단안을 적시에 내려야 한다. 그런데 노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은 일이 걷잡기 어려울 정도로 확산될때까지 내버려두는 경향이 있다는 인상을 줘왔다.
새 경제팀이 들어선후 6공정부가 정치생명을 건듯 요란스럽게 내어 놓았던 경제개혁정책은 반전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경제정의실현이란 거창한 약속은 많은 서민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려 놓았었기 때문에 그걸 되돌린다면 그 불가피성을 여권은 국민들에게 설득할 의무와 필요가 있다. 그런 설득작업은 청와대 수준에서 나오는게 옳다고 본다.
그러나 실제로는 구렁이 담넘어가듯 적당히 넘어가려는 기미가 짙다. 세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건질수 없으니 우선 한두마리만 건져야 겠다는 우화식 설명만으로는 설득이 안된다.
독재시대에서처럼 청와대가 무소불위로 권력을 전횡하려는 기대는 결코 아니다. 독재권력과 민주제도 아래에서의 리더십은 분명 다르다. 국민이 기대하는 것은 5공청산과 거여를 이룬것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었다면 그 목적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6공 제2기의 청사진,비전과 의지를 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제발 찻잔속의 태풍으로 끝났어야할 좀스러운 인파이팅이 여권전체를 뒤흔드는 위기국면으로 확산되게하는 방관자세는 그만둬 달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청와대가,더 정확하게는 노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여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중요 사안에 대한 대통령의 확고부동한 지휘통솔이 적시에 나오지 않을때 결과하는 것은 공직자사회의 방향상실증이고 그 피해는 직접 국민생활에 와 닿는다. 위의 눈치보기로 잔뼈가 굵은 관료조직은 권위주의시대의 타성에 따라 청와대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책이 이랬다 저랬다하고,어제의 야가 오늘의 여가 되고,어제의 「실력자」가 내일의 기피인물이 되는 요즘 상황아래서는 누구도 소신을 갖기 어렵다. 무사안일의 속성만을 탓할수도 없는 형편이다.
국민은 국민대로 불안하다. 정부나 정치에 대해 확고한 예측을 못하니 장래를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어렵다. 그래서 불신이 쌓이고 앞이 콱 막힌듯한 좌절감이 확산되고 있다. 「집세 자살」이 이어지고,폭력배가 날뛰고,투기가 성행하고,과소비가 유행이 되고있는 현상들은 모두 거여가 안정된 자리를 잡고 일관된 방향을 제시할때 상당부분 잠재워질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징좌들을 모두 최고 권력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물론 논리의 비약이다. 그러나 여러 의미에서 과도기를 겪고있는 우리사회에서 정치는 안정된 사회보다 훨씬 더 큰 비중으로 조타수역할을 해야하며 국민들은 그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가 그렇지 못하니 시정에서 청와대는 무얼하고 있느냐는 불평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노대통령은 이제 지금까지와 같은 현안과 거리를 두는듯한 스타일에서 벗어나 큰 정치를 위한 비전과 국정의 총체적 프로그램을 보여 주기를 간곡히 당부하고 싶다.<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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