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끝없는 탈출 … 그러나 안전지대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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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디아스포라(Diaspora)'란 말이 있다. 본래는 팔레스타인 바깥의 유대인을 뜻하지만 요즘엔 한국 문단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우리 문단에선 한반도 외부에 거주하는 한민족의 삶을 다룬 문학에 '디아스포라'를 갖다 붙인다. 이른바 '한국적 변용'의 예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중국 옌벤이나 동남아시아가 배경인 소설이 최근 부쩍 늘어났다. 탈북자나 조선족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소설 무대의 확장이란 점에서 일단 주목할 만한 경향이다.

강영숙(40)의 첫 장편 '리나'(랜덤하우스코리아)도 일종의 탈북자 얘기다. 열여섯 살 리나가 탄광 노동자 아버지를 따라 국경을 넘으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소설은 P국을 향한 리나의 여정을 담는다. 말하자면 한 소녀의 파란만장한 탈출기인 셈이다.

그러나 소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리나의 국적은 끝내 공개되지 않는다. 북한인 게 뻔하지만 작가는 입을 다문다. 이상향으로 그려지는 P국도 결국 남한이겠지만 P국은 P국으로만 불린다. 중국 대륙을 떠돌고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로 팔려가도 리나의 여정은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작가가 국적을 숨긴 의도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효과는 분명하다. 구체적인 지명(地名)이 생략되면서 소설은 한 소녀의 탈출기를 넘어 중층적으로 읽힌다. 리나는 시종 탈출을 욕망하고 시도한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한다. 아니 탈출에는 성공한다. 그러나 탈출 뒤에도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처음 국경을 넘은 리나는 화학약품공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다 살인을 저지른다. 두 번째 탈출 뒤 리나는 싸구려 가수가 되고, 다음엔 몸을 판다. 같은 국적의 여자애를 팔아넘기기도 한다. 아무리 국경을 넘어도 삶은 고단하고 참혹하다.

그럼에도, 사람은 살아가고 일상은 이어진다. 창녀촌의 아이들은 엄마가 돈을 벌 때 공을 차며 뛰놀고, 리나와 함께 국경을 넘었던 봉제공장 언니는 공해물질 가득한 공기를 마시며 아이를 낳는다. 리나도 한 남자를 만나고 사랑을 느낀다.

리나가 부르는 노래에 이런 구절이 있다. '도시 사람들이 또 물어. 어디서 왔냐고요? … 그럼 난 수줍게 말하지. 국경이오.' 탈출자를 인솔하는 브로커의 대사 중엔 이런 것도 있다. '당신들한테 안전한 데가 어딘데?'

리나에게 탈출은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투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혈액이 든 비닐주머니'와 같다. 하나 날마다 국경에 내몰리는 건, 그래서 끊임없이 탈출을 욕망하는 건 리나만이 아닐 터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안전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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