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놀이문화와 행복지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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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호이징가는 '호모루덴스'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이 말은 '유희하는 인간', 즉 '놀 줄 아는 인간'이란 뜻으로 인류의 특성을 놀이에서 찾고자 했다. 이 논리가 유명해진 것은 문화가 먼저 발생하고 그 다음에 유희가 생겼다는 그동안의 학설을 정면으로 부정했기 때문이다. 호이징가는 유희가 먼저 발생한 뒤 그것이 문화로 발전했다고 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놀 줄 아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강아지나 고양이가 공 같은 것을 갖고 움직이는 것을 보면 노는 것 같지만 그것은 먹이를 구할 때의 본능적인 몸짓으로 생존을 위한 필요 불가결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처럼 놀 줄 알게 된 것이 인류문명의 씨앗이 되었다.

놀 줄 아는 인간들에 의해 표출된 '바다이야기'는 놀이문화가 도박과 같은 사행성과 연계되었을 때 그 파급효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준 단면이다. 정부에선 검찰 수사를 통해 바다이야기에 연루된 비리 인사들과 불법행위의 실체를 밝히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수순을 밟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마무리되더라도 우리 사회에 잠재해 있는 도박 중독성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도박에 대한 잠재적 수요와 공급이 일시적으로 수면 아래 잠복하거나 음성적으로 진행되다가 또 다른 바다이야기가 언제 다시 불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경마.경륜.경정.카지노.복권 등 사행성 게임 관련 사업 규모가 지난해 35조원에 이르렀다. 여기에 비밀 카지노바 등 음성적 도박산업까지 감안하면 51조원 수준으로 추정된다니 놀랍기만 하다.

사회심리학적으로도 사행성 게임의 본질은 인간의 본능을 이용해 인간을 파멸시키는 '인간사냥' 쯤으로 보아야 한다. 게임 개발자가 추구하는 설계의 최종 목표는 '이용자들의 중독성 극대화'에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사행성 게임 이용자가 쉽게 중독되도록 인간의 본능, 즉 몰입.소유 본능, 타인과의 비교 본능, 강박 본능이 최대한 발현될 수 있게 게임을 설계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사행성 게임은 호이징가 박사가 지적하는 호모루덴스와는 다른 인간의 한탕주의와 다를 바 없다. 인간은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본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인지능력이 낮은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일이나 건전한 취미에 몰입하기 어려운 서민층의 경우 게임을 빙자한 인간사냥의 덫에 걸려들 개연성이 높다.

이렇듯 우리 사회에 내재돼 있는 도박 문제는 단속과 처벌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장기적인 이야기지만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최상층에 '경쟁' '부자' 대신에 '행복'이 자리 잡아 나가도록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내면적인 보람이나 만족을 느끼며 행복해 하는 국민의 비중을 점차 높여 나가야 하는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허즈버그는 1950년 인간을 만족하게 하는 '만족 요인'과 불만족스럽게 하는 '불만족 요인'이 서로 별개라는 요지의 '2요인 이론(two factors theory)'을 제시했다. 돈이 적으면 불행을 유발하지만 돈이 많다고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하며,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성취감.인정.자아실현 등 일과 관련된 것들이라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하버드대학에서는 '행복학' 강좌가 개설돼 긍정심리학에 대한 강의가 인기리에 이뤄지고 있다. 영국 정부도 학생들의 교육과정에 '행복수업'을 도입, 내년부터 시범 실시할 계획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제 규모는 세계 10위권 안팎으로 성장했지만 행복지수는 세계 102위 정도에 불과하다. 강력한 도박 단속을 벌이는 것이 외과적 수술이라면, 국민의 행복지수를 높여 나가는 일은 내과적 처방이다. 바다이야기가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숙제다.

서교일 순천향대 총장·의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