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의 합리적 현실 인식(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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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여론조사에 나타난 새 경향 살려야
일부의 우려와는 달리 근로자들은 올해의 노사관계를 낙관하고 있으며 현 상황에 대해서도 매우 현실적인 인식을 갖고 있음이 거듭 확인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9월 조사한 「노동문제및 노사관계에 대한 근로자의식 조사연구」 결과를 보면 64.6%의 근로자가 올해 노사분규는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근로자들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되어 지난 2월말 노동부ㆍ상공부 등 당국이 집계한 올해 노사분규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75%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조사에서 「최근 근로자의 임금인상 요구는 경제여건과 회사사정을 고려할때 지나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가 41.5%인 반면 「그렇다」가 58%나 돼 근로자들도 급격한 임금인상이 가져올 경제위기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근로자들의 온건하고 현실적인 인식은 정부와 기업이 적절하게만 대처한다면 올해의 산업현장은 그 어느 해보다 안정적이고 협조적인 분위기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란 낙관적인 전망을 낳게 하고있다. 공은 근로자로부터 정부와 기업측에 넘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임금인상 요구가 지나친 것이라는 의견이 58%나 된다는 것은 근로자들이 현재의 생활여건에 만족한다는 뜻일까.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다. 「최근 3년동안의 임금인상으로 살림살이가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54.8%가 「그대로다」 12.4%가 「오히려 나빠졌다」고 응답하고 있다. 이는 임금은 올랐으나 물가상승과 집값ㆍ전세값폭등 등으로 실질 생활은 향상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근로자들이 많음을 일러준다.
결국 많은 근로자들이 임금인상 요구가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현재의 임금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라기 보다는 그것이 실질생활의 향상에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못한다는 자각을 바탕으로 한 의견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정부와 기업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본다. 물가억제,주택마련기회의 확대 등 생활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킬 정책이나 방안이 마련된다면 임금을 크게 인상하지 않고도 충분히 근로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올해 노사문제의 해결방향은 정부차원에서든,기업차원에서든 근로자들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적절한 방안을 찾아내는 데 있음이 분명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정부나 기업은 개별노조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 심한 우려를 갖고 있었으나 조사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특정 정당이나 후보에 대한 지지활동 또는 정치세력과의 연대활동강화에 대부분의 근로자들이 반대하고 있다.
다만 근로자들은 정부의 정책결정이나 정치과정에서 근로자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활동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노조의 정치세력화와 혁신정당 출현에 대한 높은 지지율이다.
전체적으로 우리 근로자들의 의식은 매우 합리적ㆍ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다. 정부와 기업은 이러한 근로자들의 합리적 요구에 적절히 대응할 줄 알아야 한다. 모처럼의 자제분위기를 노동활동의 억압이나 임금억제의 구실과 기회로 삼는 것은 산업평화를 스스로 깨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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