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실질 가치 21년 만에 최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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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화 가치가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최근 두 달간 엔화 가치가 크게 떨어지면서 엔화의 실질 가치는 21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4일 보도했다.

FT는 일본 경제 부활과 제로금리 폐지 등에 힘입어 올 하반기 엔화가 강세를 나타낼 것이란 예상과 달리 엔화 가치가 급락한 것은 엔 캐리 트레이드가 다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일본 중앙은행(BOJ)이 금리를 더 올리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힘을 얻으면서 국제 외환시장에서 금리가 낮은 엔화를 빌려 고금리 국가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가 크게 늘고 있다는 것이다.

엔 캐리 트레이드란 유럽 등의 자금 수요자가 일본에서 엔화 자금을 빌려다 자국통화로 바꿔 쓰는 것으로 이 경우 엔화 공급이 늘어나기 때문에 엔화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엔화 가치는 주요국 통화 전체에 대해 약세를 보이고 있다. 유로화에 대한 엔화 가치는 6월 초 유로당 143엔에서 지난주 말 150엔 초반까지 떨어졌다. 유로화에 대한 엔화 가치는 2002년 초 110엔대에서 계속 떨어져 현재 1999년 1월 유로화 도입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미 달러에 대한 엔화 가치도 7월 이후 2.3% 내렸고, 뉴질랜드 달러와 호주 달러에 대해서도 각각 10%, 5.7%나 하락했다. 원화에 대한 엔화 가치도 8월 초 100엔당 840원에서 4일 822원대까지 내려갔다. 원-엔 환율이 100엔당 1000원 아래로 내려간 것은 2005년 2월부터다.

엔화가 미국보다 유럽과 호주 등에 대해 약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미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금리인상 가능성이 작아지고 있는 반면 유럽과 뉴질랜드 등에서는 중앙은행 당국자들이 추가 금리인상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어 이곳에서 엔 캐리 트레이드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뱅크오브뉴욕의 네일 멜러 외환 투자전략가는 "일본의 경제지표가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일본은행의 금리인상 명분이 약해지자 엔 캐리 수요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10년 만기 국채수익률은 5월 연 1.99%에서 현재 1.63%로 낮아졌다.

향후 엔화 전망에 대해서는 BOJ의 금리인상이 없을 경우 엔화 약세가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이 많지만, 이달 중순 열리는 서방 선진 7개국(G7) 재무장관 회담에서 아시아 통화 절상의 필요성을 강조할 경우 다시 반등할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한편 엔화 약세가 계속되면서 일본과 경쟁관계에 있는 정보기술(IT), 철강, 자동차업체 등 국내 수출기업이 타격을 받을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그러나 대우증권 이경수 연구원은 "최근 엔화 약세는 일본경기 둔화 가능성보다 국가별 금리수준에 대한 기대 차이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어서 계속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며 "우리나라의 경상수지도 나빠지고 있기 때문에 엔화 약세로 인한 상대적인 원화 강세가 제한적인 수준에서 마무리될 가능성이 커 우리나라 수출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창희 기자

◆캐리 트레이드(carry trade)=저금리 국가의 통화를 빌려 고금리 국가의 자산에 투자하는 것. 빌린 통화가 일본 엔화일 경우엔 엔 캐리 트레이드라고 불린다. 일본이 장기 불황을 겪었던 10여 년간 제로 금리를 써왔기 때문에 그 기간 중 제로 금리의 엔화를 이용한 엔 캐리 트레이드가 많았다. 엔 캐리 트레이드는 일본 금리 정책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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