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살짜리가 전화로 영어과외(교육 이대로 둘 것인가:4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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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문어발식 조기교육 큰 폐해/생계힘든 농어촌ㆍ도시변두리선 “그림의 떡”
서울 신사동에 사는 4세짜리 송지영양의 하루는 매일 오전7시30분 어김없이 걸려오는 「전화과외」로 시작된다.
『헬로,굿모닝…』아직 잠이덜깬 목소리로나마 생활영어 그룹지도교사와 영어로 간단한 아침인사를 나눈다. 이른바 전화방문 학습이다.
오전 10시 집부근 강남의 S미술학원에 가 그림그리기뿐만 아니라 읽기ㆍ셈하기 등을 겹치기로 배우다보면 점심시간. 지영이가 다니는 유치원이 요즘 방학중이므로 대신 미술학원 유치반에서 오전을 보내는 것이다.
점심을 먹고나면 미술학원 옆에 있는 음악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이어 같은 건물에 있는 무용학원으로 간다.
장차 무용을 전공시키려는 게 아니라 균형잡힌 몸매를 가꿀 수 있다해서 여자어린이들사이에 유행하는 무용교습을 받는다.
이틀에 한번씩은 저녁식사전에 영재교육프로그램에도 참가한다. 같은 또래의 이웃 어린이 여섯명이 한데 모여 덧ㆍ뺄셈에다 간단한 영어까지 가르쳐 주는 이 프로그램은 지영이 엄마가 유독 좋아한다.
글을 읽고 쓰거나 쉬운 셈을 척척 해내는데다 뜻도 모르는 시조까지 줄줄 외어 지영이가 영재일거라는 기대감과 자부심마저 느끼게 되는 까닭에서다.
『우리 지영이가 이런식으로만 계속 자라준다면 10여년후에는 명문대생의 학부모가 되겠지….』 그래서 한달 평균 30만원쯤 드는 학원비가 전혀 아깝지 않다.
지영양의 하루일과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저녁식사후 일일학습지를 하고 나면 오후 9시반. 머리맡에 동화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고 바쁜 하루에서 헤어나 꿈길로 접어든다.
학원이나 유치원에 가지않는 토요일에는 유아영어 그룹지도반에 보내는 지영엄마는 이것도 성에 안차 국민학교 입학전까지 사회단체의 유아과학교실에도 보내겠다고 벼른다.
서울 송파동 Y유치원의 이모교사(26ㆍ여)는 입학원서중 부모의 자녀교육관을 묻는 칸에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남과 함께…」 「인간미 넘치는…」 운운하며 매우 바람직한 전인교육관을 피력한 것을 볼때마다 묘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그런 학부모들이 정작 유치원교사나 자녀들에게 요구하는 걸 보면 입학원서에 적어낸 자녀교육관과 정반대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자기 아이가 주위 다른 애들보다 문자해득이나 셈이 다소 처지는 듯싶으면 『이 유치원은 왜 아이들을 놀리기만 하느냐』고 따지기 일쑤고 자녀들을 각종 학원으로 전전하게 만들고 있다.
현재 이교사가 담임을 맡고 있는 40명중 자유롭게 뛰노는 어린이는 단3명뿐.
그러나 속셈학원ㆍ영재교육프로그램에서 무조건 외는 식으로 배운 아이들은 말로는 덧ㆍ뺄셈을 척척하지만 응용놀이를 시켜보면 기본적인 숫자개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이가 많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무데도 거치지 않고 유치원에 나온 어린이들이 여러 학원을 다녀본 어린이보다 좀 어수룩하고 발달이 더딘듯 하지만 1년쯤 지나면 집중력ㆍ호기심ㆍ창의력 등이 한결 뛰어난 경우가 많아요.』
이교사는 『유아의 발달단계를 고려하지 않는 무턱댄 주입식 교육효과는 얼마가지 않아 열등감때문에 오히려 흥미를 잃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유치원때부터 행여 대입재수생이 될 경우에 대비,한살이라도 일찍 국민학교에 입학시키겠다며 3세짜리를 유치원에 다니게 해달라는 부모. 국민학교 입학전까지 뭐든 닥치는대로 많이만 가르쳐주는 게 최선이라고 맹신하는 「조기교육 만능주의」.
부모들의 과열교육열과 과시욕 등이 이상적인 유아교육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있으나 「만능어린이」를 고집하는 부모들의 과욕이 자녀들을 비뚤어지게 키우는 현실이다.
문어발식 만능주의 유아교육은 어린이들이 어려운 문제에 부닥칠 때 끝까지 매달려 풀어내는 집착력이라든가,이리저리 궁리해보는 응용력과 창의력의 싹을 일찌감치 잘라버리는 것과 같다는 이교사의 우려다.
서울을 비롯한 부산ㆍ대구ㆍ인천ㆍ광주ㆍ대전 등 대도시 중산층의 이같은 야단스런 유아교육열과는 달리 농어촌ㆍ도시빈민촌에는 아예 유아교육의 사각지대로 내팽개쳐져 있다.
경기도 성남시에 사는 5세짜리 김준호군은 지난해 12월부터 강원도 춘성군 사북면에서 농사짓는 이모댁에서 지낸다. 하루벌이를 하는 부모들의 어려운 생계때문이다.
준호군의 하루일과는 동네 비탈진 산길에서 썰매타기가 고작. 농가가 띄엄띄엄 있어 친구도 없다. 기껏해야 이모댁의 3세짜리 여동생과 노는 것이 전부다. 같이 논다기보다 동생을 돌보는 것이다.
준호가 아는 글은 단 세글자 자기이름 「김준호」. 지난해 아빠가 큰맘먹고 생일선물로 세발자전거를 사줄 때 잃어버리지 말라고 자전거에 큼직하게 이름을 써준 덕분이다.
『중상류층에서는 「과잉유아교육」이 문제라지만 정반대로 너무 방치된 어린이가 많아요. 농어촌에서는 무엇보다 어린이들이 마음놓고 뛰놀게 하면서 정서 및 사회성 발달을 돕는 프로그램이 곁들일 수 있는 탁아시설이 절실해요.』
지역사회 탁아소연합회의 최선희총무는 『유아교육의 중요성에 미뤄 방치된 농어촌 어린이를 위한 탁아입법이 적극 추진돼 「빈곤의 대물림」을 막아야한다』고 했다.<김경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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