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여기 이사람] 1. 이문동 연탄공장 직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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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바람이 스산하다. 나라 안팎이 어지럽고 살림살이는 나아질 전망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래도 땀방울의 소중함을 믿으며 살아가는 시민들이 있다. 그들의 땀방울에서 우리의 희망을 찾아 나선다. [편집자]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

새벽 6시. 힘찬 기계음과 함께 연탄공장의 하루가 시작된다. 어스름이 짙게 깔린 공장 마당 한편에서는 굴착기들이 검은 산처럼 쌓여있는 분탄(粉炭)을 컨베이어로 옮긴다. 공장 안에서는 근로자 10여명이 연탄 가루가 검게 밴 고무장갑과 마스크를 착용하고 기계를 점검하고 있다. 분탄이 분쇄기와 거대한 원형 채를 통과해서 윤전기로 빨려 들어간다 싶더니 금세 22개의 구멍이 뚫린 3.6kg짜리 연탄이 줄줄이 모습을 드러낸다.

분쇄기를 조작하던 이규엽(57)씨는 "연탄을 만들어 온 지 20년이 넘었지만 새벽에 기계를 돌려 첫 연탄이 나오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새롭다"며 웃었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 자리한 '삼천리e&e'연탄공장. 금천구 시흥동의 고명산업과 함께 서울에 남은 마지막 연탄공장이다. 이 곳은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요즘이 1년 중 가장 바쁜 대목이다. 하루 평균 20만장 정도이던 생산량이 며칠 전부터 35만장으로 늘어났다. 오전 6시부터 오후 6~7시까지 직원 22명이 쉴틈 없이 움직여야 물량을 맞출 수 있다.

"예전에 비하면 35만장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 1980년대에는 하루에 2백만장을 찍어내던 때도 있었으니까."

공장이 처음 들어섰던 68년부터 35년 동안 이 곳에서 근무해온 임용호(60)씨는 "식사할 틈도 없어 삶은 계란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고생은 많았지만 연탄 전성기였던 당시가 그립다"고 회상했다.

80년대만 해도 이문동에는 연탄공장 17곳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기름보일러와 도시가스가 보편화되면서 이 곳만 남고 모두 문을 닫았다. 한때 3백명이 넘던 이 곳 직원도 지금은 22명에 불과하다. 1만여평이던 공장부지는 2천4백평만 남았다.

林씨는 "그래도 연탄으로 삼남매 대학 공부시키고 결혼도 시켰다"며 "변하지 않은 건 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는 동료들의 열정과 연탄의 온기뿐"이라며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훔쳤다. 林씨 등 직원 대부분은 20년 이상 연탄 가루를 마시며 함께 살아온 '가족'이다.

40대 중후반에서 60대까지 장년층으로 구성돼 있으나 누구도 일손을 거두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들은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에 연탄 가루가 시커멓게 묻은 얼굴로 "평생 연탄만 알고 살아온 인생인데 어떻게 그만 둘 수 있겠느냐"고 입을 모은다.

공장 앞에 늘어선 10여대의 2.5t 트럭에 재빠른 몸놀림으로 연탄을 싣고 있는 도매상들도 대부분 20~30년째 이 일을 계속해왔다. 아직도 양손에 연탄 4장씩 거뜬히 들고 배달한다는 서윤구(가명.63)씨는 "요즘도 연탄 때는 곳이 있느냐고 묻지만 여전히 서민들의 연료"라고 말했다.

그는 이문동.천호동 일대와 경기도 지역으로 하루 두차례 1천5백장씩 연탄을 싣고 나간다. "불황으로 최근 몇 년 사이에 연탄을 찾는 사람들이 제법 늘었다. 1백원짜리 동전 3개를 들고와 한장씩 사가는 독거노인도 많다"고 말한다.

하지만 삼천리 연탄은 내년 5월까지 문을 닫아야 하는 처지다. 인근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계속 탄가루 공해 민원을 제기하는 데다 부지도 반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임대 사용해온 철도청 부지 3천여평에 새로 전동차 기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공장에서 불과 3m 떨어진 곳에서는 이미 기지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68년부터 강원도에서 공장 앞까지 분탄을 실어날랐던 철로도 지난 6월 철거됐다. 현재 공장 앞에 쌓여있는 7만여t의 비축 분탄이 바닥나면 35년간 연탄을 찍어낸 윤전기도 멈추게 된다.

김두용(54) 삼천리e&e 이사는 "지역 주민들이 양해해 준다면 철도청 부지를 반납한 뒤 남은 회사 땅 1천5백여평에서 계속 공장을 가동하고 싶다"며 "우리 경제가 이만큼 발전된 데에는 연탄의 힘도 있었다는 자부심을 갖고 직원들 모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오늘도 땀을 흘리고 있다"고 말했다.

신은진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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