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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앓는 미술계 좌충우돌의 격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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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우리 시대 한국미술을 사람에 비유한다면 어느 시기쯤 와 있을까. 1일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에서 막을 올리는 '사춘기 징후'는 199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한 단면을 '사춘기'라 푼 전시다. '한국 미술이 기껏 사춘기에 머물러 있다는 말인가' 반문할 관람객에게 기획을 맡은 안소연 삼성미술관 리움 학예연구실장은 말한다. "제도의 언저리를 맴도는 동시대 미술가의 심리적 갈등이 '사춘기'라는 인생의 과도기에서 겪게 되는 내면 모순과 놀랄 만한 유사성을 지닌다는 점에 착안했다."

전시장 들머리에서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들은 듯하다. 웃통을 벗은 분홍빛 청년 둘이 보인다. 최민화씨의 '분홍-개 같은 내 인생'이다. 도시를 떠도는 부랑아에 마음을 둔 작가의 눈길은 멀리 80년 광주로부터 시작됐다. 최씨는 "나는 상처를 핥는다. 분홍빛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석은 말초적이고 애상적이다. 그것은 분홍의 세계에 대한 매우 표피적인 해석에 불과하다"고 썼다. 분홍은 불의에 대항하는 증오, 불안 속에 삶의 희망을 보는 힘의 상징이다.

'분홍' 옆에서 음악을 울리는 이는 배영환씨다. 낡은 화장대를 뜯어 만든 기타 작품 '남자의 길-완전한 사랑', 골목길 창틀 속에서 물놀이를 하는 청소년 영상설치물 '유행가'는 사춘기에 대한 회고이자 청춘 애가다. 서도호씨는 고등학교 때 입었던 남학생 교복 60벌을 꿰매 한 덩어리로 세웠다. 목 위는 없다. 한 학급 60명은 제복에 갇힌 '공부하는 기계'였다.

'사춘기'의 과거를 훑고 난 관람객은 현재로 건너간다. 전시장 안쪽은 발랄과 파격과 과격함이 넘쳐난다. 향수가 없어서일까. 장지아씨는 자신의 비디오 '작가가 되기 위한 신체적 조건' 속에서 무지막지하게 얻어터진다. 청소년과 예술가 지망생은 완성을 향한 길에서 온갖 수모와 비굴함을 겪어야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빨강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를 그린 김홍석씨의 단편영화 '와일드 코리아', 달리는 트럭에서 신나게 랩을 불러 젖히는 임민욱씨의 '뉴타운 고스트', 한반도 집값의 정체를 밝힌 '플라잉 시티'의 '블록스터디 2-사춘기', 다락방에 처박혀 보던 '빨간책'의 회상을 되살린 양만기씨의 '피터팬-관계의 언어', 도시 소년의 쓸쓸한 소외를 그린 박진영씨의 '3초간 정지된 소년들'까지, 한국 미술의 '사춘기 징후'는 좌충우돌 폭넓게 제시된다.

마무리는 상큼하다. 사춘기에 만화가 빠질 수 없다. '새침한 와이피'란 필명으로 알려진 유영필씨는 만화 벽화로 인간의 이중성을 발가벗기고, 만화가 현태준씨는 바닥을 기어야 볼 수 있는 인형 설치물 '밟을 것 같은'에 사춘기의 명랑성을 담았다.

30.40대 작가 12명이 펼치는 사춘기 행진을 돌아 나오면 느낌표 하나가 떠오른다. '우리 사회는 사춘기!'.

전시는 11월 5일까지. 02-2259-7781(rodin@rodingallery.org).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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