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노린 출마 생각도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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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48년 7월17일에 공포된 제헌헌법 제97조의 규정에 따라 49년 7월4일 법률 제32호로 공포된 지방자치법이 같은 해.12월15일 한차례 개정을 거쳐 50년 12월 지방자치를 위한 선거를 실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6·25동란으로 선거가 연기되어 52년4월25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시의회 의원선거가 실시됐다.
이 선거도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와 강원도 등 계엄령이 선포된 지역은 실시되지 못했다. 전국 19개 시 가운데 17개 시 에서만 선거가 실시됐고 전북에서는 3개시 모두 실시됐다.
당시 나는 정계에 진출 할 뜻을 두지 않은데다 선친께서 가업으로 경영하시던 수산시장 주식회사에서 열심히 일만 하고있던 터라 시의회 의원 출마는 생각조차 못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48년과 50년에 있은 두 차례 국회의원 선거 때 국민학교부터 대학까지 동기동창이었던 친구의 선거운동을 도우면서 사귄 친구들과 수산회사 전무로 계시던 양성순씨가 자신이 출마하려 했지만 내가 출마한다면 포기하겠다며 출마를 권해 뜻을 세우게 됐다.
무소속이지만 막상 출마를 결심하자 져서는 안된다는 자존심이 발동, 열심히 뛰었다.
우리 초대 시의회는 처음 해보는 민주주의에 의욕은 컸지만 기대한 만큼 성과를 올렸는지 모르겠다. 다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38년 전 일이라 모두 기억할 수 없지만 우리 초대 시의회는 도의회에서 도청을 이리시로 옮기는데 동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적극적으로 저지했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타계하셨지만 선배의원 한분은 도의회의 전주출신 의원이 도청 이전을 찬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나 도의회 사무실로 찾아가 주먹다짐까지 했을 정도였다.
무소속 시의회 의원들 가운데 나와 유수복, 임종술씨 등 소장파 세명은 전지회 라는 모임을 갖고 의회의사를 결정짓는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중 임씨는 나와 함께 54년 국회 의원 선거 때 무소속의 이철승씨를 지원하다가 경찰로부터 곤욕을 치렀다.
나는 56년8월에 실시된 도의회에 진출하려 했지만 자유당의 입당 권유와 이를 거절할 경우 사업에 미칠 영향, 그리고 야성 기질의 상충 등으로 출마를 포기하고 말았다.
도의회나 시의회 진출자들은 자신의 사업을 지키거나 이(이)를 추구할 목적이라면 출마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지역사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줄 알고 정열을 불태울 일꾼만이 의회에 들어가야 한다.
민주주의 길을 넓히기 위해서는 여도 야도 없고 황색·흑색바람도 없으며 오로지 지역주민·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해 주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양 용 태씨<초대 전주시의원·6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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