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안찾는 상담실(교육 이대로 둘 것인가:4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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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전문교사 없고 비밀보장 안돼/주기적으로 문제아 불러 면담하는 게 고작
신설학교인 서울 강서 A공등학교 교무실 한쪽 구석에는 허름한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다.
칸막이 안쪽에는 응접세트가 놓여져 있어 뭔가 은밀한 얘기를 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놓은 인상이지만 누가 들어가는가를 한눈에 알 수 있고 무슨 말을 하는가도 신경만 쓰면 쉽게 들을 수 있다.
더군다나 학생들의 교무실 출입이 잦아 경우에 따라선 누가 그 곳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가가 학생들 사이에 금세 소문날 수도 있다.
『신설학교다 보니 따로 상담실이라고 마련해놓을 공간이 없어 급한 김에 교무실 안에 간이상담실을 마련했습니다.』
이 학교 여학생상담교사인 허모교사(42)는 『그 때문인지 상담실을 찾아오는 학생은 거의 없고 상담실 소파는 선생님들의 휴식처로 이용되다시피 한다』고 했다.
그나마도 교무실내 간이상담실은 여학생 전용. 남녀공학인 이 학교의 남학생은 학생과 내에 설치된 상담실을 이용한다.
학생들의 말 못할 고민을 들어주고 처방을 해주어야 할 상담실을 비행학생들을 야단치는 학생과 사무실 안에 설치해놓은 것이다.
『상담해준다기보다는 문제학생들을 주기적으로 불러 면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남학생 상담을 맡고 있는 김모교사(42)의 솔직한 말이다.
제대로 시설을 갖추었다고 해서 상담실을 찾는 학생수가 많은 것은 아니다. 명문인 서울 B고교의 경우 15평 남짓한 상담실을 갖고 7명의 교사가 상담을 맡고 있으나 신상문제로 고민을 털어놓으러 오는 학생은 거의 없다고 한다. 기껏해야 진학ㆍ진로문제를 상담하러 오는 것이 전부다.
학생의 입장에선 무엇보다도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불안감 때문에 아무리 고민이 있어도 상담실을 좀처럼 찾게 되지 않는다고 대부분의 중ㆍ고교생들은 입을 모은다.
얼마전 서울 C여중 교도주임 정모교사(43)는 한 사설전화 상담소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 학교 2학년 학생이라고만 밝힌 한 여학생이 임신을 했는데 고민 끝에 전화상담을 해왔으니 그 여학생을 찾아 해결해주라는 내용의 전화였다.
정교사는 그 여학생이 서울대 주변에 살고 있다고 했다는 전화내용에 따라 짐작이 가는 학생을 불러 이틀간의 면담 끝에 찾아내 모든 얘기를 들었으나 그같은 사실을 양호교사에게 얘기했고 그 얘기는 교장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결국 비밀이 지켜지지 않아 노발대발한 교장의 퇴학조치 주장을 강제전학 정도로 누그러뜨리고 정교사는 교도주임직을 그만두었다. 상담의 첫째 요건인 「비밀보장」이 되지 않았다는 죄책감에 자리를 물러난 것이다.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해줄 것 같지도 않고 괜히 상담실을 찾아가 비밀을 털어놓았다가 긁어부스럼을 만들면 어떡합니까.』
인천 D여중 3학년 학생이 밝힌 상담실을 찾지 않는 이유다. 그러나 우리나라 상담교육의 더 큰 문제점은 전문상담 전담교사가 없다는 데에 있다.
대부분 나이많은 윤리과목 담당교사들의 경험적 처방이 고작일 뿐 심리적 갈등의 원인에서부터 해결책의 제시ㆍ사후관리 등 체계적 상담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상담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육위원회가 실시하는 2백40시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되지만 그 정도의 교육을 받는다 해도 전문가야 될 수 있겠느냐』고 상담교사들은 반문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의 경우는 거의 예외없이 수업도 해야 하고 심지어 담임까지 맡아야 하는 경우도 있어 상담교사들에게 실질적인 상담역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서울시교위 카운슬러협회가 지난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교도ㆍ상담교사의 주당 수업시간수는 10∼14시간으로 문교부가 내려보낸 교도주임의 주당 수업시간 6시간과는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교사들 스스로도 상담활동을 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애로점을 시간부족(35.8%)으로 꼽고 있다.
또한 예산확보도 되지 않아 별도 예산없이 시교위에서 각 학교에 지급하는 상담예산 연 10만원만으로 상담을 꾸려나가는 학교도 47.5%에 달하고 있다. 심지어 4.7%는 아예 상담실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부산 K여고 김모교사(45)는 『미국의 경우는 학생 5백명당 한명의 전문 카운슬러를 두고 오직 학생들에 대한 상담에만 전념토록 하고 처우도 의사수준』이라며 겨울이면 온종일 조개탄을 지피는 일에 매달려야 하는 자신과 비교했다.
『결국 학교교육중 상담기능의 부재현상은 학교교육 자체를 부실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사회문제로 치닫는 악순환이 거듭되는 겁니다』
서울 C고 정모 상담교사(40)는 『이런 실정임에도 학교행정이 상담에 소홀하고 전문교사를 양성,배치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걱정하고 있다.
자리만 만들어놓고 아무에게나 자리를 메우는 식의 상담교사제. 점수에 매달린 학교교육의 또 하나의 교육실책이 학생들을 가다듬지 못하는 뼈저린 교육현실이다.<이연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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