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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커버 스토리] 유혹이 숨쉰다 … 디자인은 生物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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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계는 지난 20세기를 '생산과 유통의 시대'라고 불렀다. 그럼 소비자들의 개성과 감성이 첫째 고려 사항으로 떠오른 21세기는? 전문가들은 주저없이 "디자인이 바통을 이어받았다"고 단언한다. 그만큼 디자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소비자를 감동시키는 디자인을 만드는 비결은 무엇일까. week&은 세계적인 기업에서 디자인 분야를 지휘하는 책임자들에게 디자인의 현재.미래와 디자인 철학에 대해 물었다.

독일의 자동차 제조사인 BMW의 크리스 뱅글 수석 디자이너,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의 정국현 상무, '키티'라는 캐릭터로 유명한 일본 산리오사의 야마구치 유코 캐릭터 디렉터를 직접 찾아가 만났다. 이탈리아의 토털패션 브랜드인 아르마니 그룹의 조르지오 아르마니 회장은 e-메일 인터뷰로 합류했다. week&은 인터뷰 내용을 지상 좌담회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좋은 디자인이란

크리스 뱅글=디자인은 제품의 숨겨진 의미를 표현하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모양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제품의 컨셉트와 철학,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담아내야 하죠. 또 시각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촉감이나 후각적 요소까지 자연스럽고 정교하게 어우러져 균형을 이루어야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조르지오 아르마니=저는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은 하지 않아요. 시각적인 아름다움에만 치중하기보다 옷을 입는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간결함(Simplicity).우아(Elegance).질(Quality).편안함(Comfort)에 중점을 두죠. 자신만의 디자인 철학이나 소신이 없는 디자이너들은 하루 아침에도 트렌드가 바뀌는 패션계에서 길을 잃기 쉬워요.

정국현=어떤 상품의 디자인이 좋고 나쁘다는 것을 따지는 첫째 기준은 팔리느냐의 여부가 아닐까요. 특히 요즘 전자업계에선 어떡하면 소비자들이 특정 제품의 디자인에 대해 질리지 않고 매력과 친근감을 계속 느끼도록 하느냐는 게 화두입니다.

야마구치 유코=사람들이 정말로 원하는 디자인은 부모와 아이들 모두에게 통하는 디자인이에요. 즉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어떻게 바뀔까

야마구치=캐릭터 산업 디자인의 미래를 내다보기란 사실 불가능에 가까워요. 디자인이란 게 워낙 경제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죠. 대체로 캐릭터 업계의 디자인은 5년 주기로 변하는 것 같아요. 참고로 요즘 일본의 캐릭터 디자인의 키워드는 '여자아이다운 것'이랍니다. 예쁜 리본이라든가 드레스에 들어가는 반짝이 무늬 같은 소재가 인기죠. 공주나 요정을 주제로 한 캐릭터도 잘 나가고요.

아르마니=10년 전만 해도 패션디자이너들의 관심사는 '미니멀리즘(장식과 디자인을 가급적 줄이고 단순미를 강조하는 패션 경향)'이었습니다. 그러나 10년쯤 뒤에는 환경친화적이고 자연미를 강조한 디자인에 대한 고민과 관심이 커질 것으로 보이네요. 사람들의 관심사가 점점 그런 방향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죠.

뱅글=21세기에 접어든 뒤 몇년간 디자인이 감성에 호소하는 쪽으로 뚜렷하게 변화했다고 생각해요. 아마 앞으로도 더 감성적으로, 더 우아하게 변하겠죠. 참고로 자동차 디자인은 기술의 발달에 따라 전혀 새로운 모습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정=업종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은 최근의 디자인 조류입니다. 최근 바비 인형을 만드는 미국의 디자이너들이 전자제품을 디자인하는 우리 연구소를 찾아왔어요. 다른 업종의 트렌드를 참고하려는 거죠. 디자인을 채택하는 속도가 빨라진 것도 주목할 만한 특징입니다. 5년 전만 해도 제품의 디자인 컨셉트를 잡아 상품으로 만드는 데까지 대략 3년이 걸렸는데, 지금은 1년 정도랍니다. 10년 뒤라면? 더 엄청난 속도로 변하겠죠.

#소비자의 욕구에 맞추려면

아르마니=저는 디자이너들에게 늘 '패션은 혁명이 아니라 노력(Evolution not revolution)'이라고 강조해요. 독창적이고 예술성을 발휘하는 것 못지않게 현실과 시장도 늘 지켜봐야 한다는 의미죠. 다른 한가지는 철저한 팀워크예요. 아이디어를 내는 단계는 물론, 소재와 형태를 선택할 때도 함께 고민하고 의논하도록 하죠.

야마구치=자신이 좋아하는 색깔이나 좋아하는 것을 그리는 게 디자인은 아닙니다. 일반 대중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디자이너지 예술가가 아니니까요.

뱅글=소비자가 자동차를 보고 "이건 크리스 뱅글의 디자인이네"라고 하는 게 아니라 "야, 이건 딱 내 차다"라고 말해야 성공한 디자인입니다. 제품에서 소비자 자신의 개성을 발견하게 하는 거죠.

정=불과 몇년 전만 해도 실력있는 디자이너 몇명의 손을 거치면 비교적 '안전한'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요. 디자인에 관심을 갖고 있는 아마추어들이 전문가보다 트렌드를 잘 읽어내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러니 산업 디자인에 몸담은 사람들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어요. 눈이 높아진 소비자들이 '나만의 것'을 원하는 경향도 뚜렷해졌어요. 일본의 소니사만 해도 얼마 전부터 부품 하나 하나를 손으로 조립하는 수공예 TV를 내놓고 있죠.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에 한정된 생산량 때문에 대당 1천4백여만원이나 하는데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더군요.

#나는 이렇게 노력한다

아르마니=가장 중요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철저한 소비자.시장 조사입니다. 특히 우리는 전세계 소비자들을 상대로 상품을 내놓다 보니 어떤 지역에서 어떤 디자인이 먹히는지 알아내는 일에 가장 신경을 쓰고 있어요. 준비해 둔 특정 디자인을 언제 내놓아야 하는지를 파악하는 타이밍도 중요한 포인트랍니다.

뱅글=마케팅 서베이는 기본입니다. 순수하게 디자인 분야에서만 본다면 사람에 대한 투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죠. 모델러(디자인 스케치를 기초로 모형차를 만드는 전문가들) 양성 학교를 운영하는 회사는 서구에선 우리밖에 없어요. 또 디자인 종사자들을 순환 근무시켜 다양한 것을 경험하고 이해하도록 해요. 그래 봐야 디자인 비용이 전체 신차 개발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1%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디자인에 대한 투자는 아낄 필요가 없다는 거죠.

정=우리 회사는 서울 외에 로스앤젤레스.샌프란시스코.도쿄.런던 등에 디자인 연구소를 두고 세계의 흐름을 읽어요. 특히 요즘엔 눈으로 보는 디자인말고도 오감(五感)과 감성을 모두 고려하는 디자인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지요. 이를테면 가전 제품의 소리도 디자인합니다. 이른바 '사운드 디자인'이죠. 우리 팀은 2000년부터 유럽과 아시아 각국을 돌며 휴대전화 벨소리 등을 현지 소비자들에게 들려주고 선호도를 조사하고 있어요.

야마구치=많은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TV나 영화같은 매체를 자주 접하는 것도 좋은 디자인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죠. 저는 또 디자인을 포함한 많은 것의 '과거'를 읽어내는 데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어요. 과거의 일들이 현재에도 다시 나타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죠. 디자인의 윤회라고 표현하면 조금 이상할까요. 그래서 과거의 실패.성공 사례를 두루 공부하죠.

도쿄=신예리 기자 . 김현기 특파원
콸라룸푸르=이경희 기자

<디자이너 프로필>

◇ 크리스 뱅글(Chris Bangle.47)=세계적인 자동차 브랜드인 BMW 수석디자이너. GM의 자회사인 독일 오펠(Opel), 이탈리아 자동차회사 피아트(FIAT)를 거쳤다. 그는 50년간 유사한 디자인을 고수해오던 BMW에 인테리어 디자인 개념을 도입하는 등 창의력과 실험 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 조르지오 아르마니(Giorgio Armani.69)=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아르마니 그룹의 회장. 니노 체루치(Nino Cerruti)의 디자이너 등을 거쳐 1975년 이 회사를 세웠다. 비정형 재킷을 개발하고 이브닝 드레스에 굽이 낮은 구두.운동화를 매치시키는 등 실용적이고 혁명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 야마구치 유코(山口裕子)=1978년 여자미술대학 예술학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고 일본의 대표적인 캐릭터 회사 산리오에 입사했다. 80년 헬로키티의 세번째 담당자가 된 뒤 지금까지 24년째 키티 책임 디자이너로 근무하고 있다.

◇ 정국현(52)=한양대학교 공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 지바(千葉)대학원에서 디자인 경영을 공부했다. 77년 삼성전자에 입사, 2000년부터 삼성전자 디자인경영센터 소장(전무)직을 맡고 있다. 2001년에는 일본 산업디자인진흥회로부터 세계 디자인을 이끄는 10대 디자이너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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