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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소득보전세제 도입하려면 최저생계비 보장정책 폐기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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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노무현 정부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는 내년에 근로소득보전세제(EITC)를 도입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제도는 일을 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근로 빈곤층에 대한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1975년 미국에서 처음 도입됐다. 현재 영국.벨기에.뉴질랜드.호주 등 선진국들이 이름을 달리하면서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 제도가 실시될 경우 김대중 정부 때 만들어진 최저생계비 보장정책과 비슷한 복지정책이 중복 실시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근로소득보전세제는 정부가 생계비 이하의 저소득층 근로자에게 일정 소득을 현금으로 지급하는 사회보장제도다. 소득공제액을 설정한 뒤 납세액이 공제액보다 많으면 차액만 내도록 하고 납세액이 공제액보다 적으면 차액을 현금으로 돌려주는 제도다.

한국은 최저생계비의 120%에 해당하는 차상위계층(次上位階層) 근로빈곤층이 132만 명이라고 한다. 이들은 사회보험 적용률이 낮고 재산.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인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보호대상자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소득 지원과 이들의 근로 유인을 동시에 달성하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실시되면 노무현 정부의 대표적인 복지정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 도입에는 적잖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재원 확보다. 근로소득보전세제 수혜자는 132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을 위한 연간 재정지출이 2조~4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지난해 최저생계비 보장정책에 약 2조원이 쓰였다.

둘째, 근로소득보전세제는 현행 최저생계비 보장정책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최저생계비 보장정책은 근로자의 실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면 그 차액을 정부로부터 보조받는다. 두 제도는 '최저생계비'와 '공제액'에 차이에 있다.

셋째, 소득 파악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돼야 한다. 현재 가구소득 파악률은 34%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최저생계비 보장정책에선 9억원 이상의 부자가 수혜자로 등록되지 않았던가.

여기에다 한국은 자영고용률이 34.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멕시코 다음으로 높고 소득신고 체계마저 없다. 근로소득보전세제를 도입하기 위해선 가구별 소득 파악이 필수적인데 부부 중 한 사람이라도 자영업자이면 가구 소득 파악에 어려움이 따른다. 한국은 비농업부문 근로자 중 자영업자 비중이 24.1%다. 주요 선진국이 이 제도를 도입했을 때보다 두 배 이상 높다. 가구소득 파악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고 근로소득보전세제 도입이 30여 년이나 된 미국에서도 99년 저소득층이 청구한 근로소득 보전액 313억 달러 가운데 35.5%가 과다 청구금액이었다. 이 사실은 이 제도를 도입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그러나 근로소득보전세제는 근로 빈곤층의 근로의욕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므로 이 제도를 도입할 경우 근로의욕을 낮추는 최저생계비 보장정책을 폐기하는 것이 낫다.

박동운 단국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