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도 초조했던 하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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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전국 80여만 수험생과 가족들의 마음을 죄게 했던 90학년도 대학입학 원서접수가 24일 그 「길고도 초조했던」 4일간을 마감했다.
서울대 관악캠퍼스 접수장에는 24일 하룻 동안 4천34명의 지원자가 몰려 저마다의 오랜 숙고 끝에 일생의 진로에 대한 주사위를 던졌다. 『원자핵공학과 외에는 가고 싶은 과가 없어요. 이 분야에서 멋진 업적을 남기고 싶어요.』 동료 5명과 함께 접수하러 온 부천고 재학생. 떠꺼머리에 아무렇게나 차려입은 옷 매무새였지만 대입에 짓눌리지 않은 생기 있는 눈빛이었다.
지원자중 상당수가 이 같은「소신파」였지만 오전 10시부터 접수장에 나와 선뜻 지망학과를 정하지 못하고 부모· 선배 등과 마감시간 직전까지 고민과 토론을 반복하는 「햄릿파」 도 적지 않았다.
이들 「햄릿파」를 특히 괴롭혔던 것은 접수장 주변에서 나돈 「고득점 재수생들의 막판 대거 지원설」.
이 맹랑한 소문으로 즉석에서 1∼2단계 낮춰 지원하는 사례가 속출하기도 했다.
선배들의 따뜻한 코피 한잔과 격려는 잔뜩 긴장하며 원서창구를 찾은 지원생에겐 더할 수 없는 위안.
『식품공학과에 지원한 수험생 여러분, 빨리 접수해요. 그리고 내년에 볼 수 있길 바랍니다.』 『눈앞에 당면한「서울대 합격」 이라는 목표뿐 아니라 우리일생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할지를 알고 추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서울대 선배들은 곳곳에서 코피판을 벌여놓고 피킷· 편지글 등을 통해 후배들에게 마음의 여유와 젊은이의 꿈을 무료로 팔고 있었다.
대학입시가 사실은 숱한 인생 역정의 첫 관문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참으로 중요한 자산은 건강과 마음의 여유라는 점을 수험생들이 새겨두어야 할 접수 마지막날의 풍경이었다.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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