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봇물처럼 터진 「다양한 욕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민주화 길목으로 일컬어진 80년대는 각양각색의 집단들이 집단적으로 욕구를 분출, 다양한 목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나와 사회 분화와 다양화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억눌렸던 계층간의 갈등·대립의식이 폭발됐고 유보된채 숨겨져 오던 통일·사회주의 이념이 서슴없이 터져 나왔다.
자칫 사회에너지를 낭비하고 국민총화를 깨뜨리는 것이 아닌가 우려할 정도로 각계 각층에서 울려나온 다양한 요구는 바로 90년대에 우리가 물어야할 과제이자 경고인 것이다.

<노동계>
노동현장의 80년대는 노동계층의 성장및 사회적 진출이 두드러지면서 눌려왔던 욕구들이 폭발적으로 분출된 시기였다.
70년대 6백만명으로 통칭되던 근로자수가 80년대에는 1천만명으로 늘어나면서 6·29선언 이후부터 노동계는 학생운동 이상으로 높은 목소리를 내게 됐다.
경공업의 여성근로자 중심이었던 70년대 노동운동과는 달리 중화학공업화 진전에 따라 80년대에는 중화학부문 대기업 남성근로자가 노동운동을 주도하면서 노사분규의 사회적 파급효과도 질적으로 달라졌다.
고도성장에 걸맞은 과실을 분배받지 못했다는 근로자들의 불만은 80년대 들어 80년 봄과 6·29직후인 87년 7∼9월의 두차례에 걸쳐 폭발적으로 분출됐다.
80년 봄의 욕구분출은 어용노조와 저임금에 불만을 가진 탄광근로자들이 경찰을 축출하고 사북읍을 4일간 점거했던 사북사태 (4월) 에서 정점을 이루며 원진레이온·동국제강·인천제철등의 파업농성으로 이어졌으나 5·17이후 노동계는 찬서리를 맞아 청계피복노조·서통·콘트롤데이타등 「민주」 노조와 노총의 1백6개 지역지부가 강제 해산되고 7백여명이나 되는 노조간부들이 「정화」 조치를 당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분규는 84년부터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 84년 대우자동차 파업과 대구·부산 택시기사 시위, 85년 구로지역 동맹파업, 87년 4월 서울택시파업등으로 번졌다.
87년 7∼9월의 노동자투쟁은 우리사회의 지축을 뒤흔드는 충격이였다. 3개월사이 1백20여만명의 근로자가 3천3백여건의 쟁의를 벌였다. 「임금인상」 「인간적 대우」 가 주쟁점이었고 관리직축출·가두시위·시청난입등 과격한 양상으로 전개됐다.
경희대 전기호교수(경제학)는 『한번은 치러야할 진통이었으며 불상사는 겪었지만 기업의 사내민주화·생산직 존중풍토가 이루어지는 계기도 됐다』 고 풀이했다.
근로자들의 요구도 임금문제에서 근로시간 단축·사원지주제·징계위 노조참여등으로 변해갔다.
최근에는 노조들의 연대투쟁 양상등이 나타나 정부측은 공권력 투입을 재개, 한때 기업이 수세에 몰렸던 역학관계가 조정국면에 접어들었다.
노동부 구연춘 노정국장은 『노동법의 현실화로 88년이후 쟁의의 준법화 경향이 늘고 있어 다행이나 파업의 장기화 추세가 큰 문제』 라고 진단했다.
노총을 배격하며 89년부터 뚜렷한 세력화를 보이고 있는「민주」 노조의 등장 역시 80년대의 새로운 풍속도이며 변수다.
80년대 노동문제는 기업측에는 노조를 사업파트너로 인정하는 숙제를, 노조측에는 회사의 성장과 분배욕구를 조화시키는 과제를 남겼으며 정부측에는 근로자들의 상대적 박탈감 해소를 위한 복지시책 마련을 숙제로 안겨줬다.

<대학가>
80년대 학생운동은 87년 6월 민주화대투쟁의 승리와 올해 7월의 임수경양 평양방문으로 상징된다.
반독재 저항운동의 차원에 머물러 있던 60∼70년대와는 달리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은 뚜렷한 목적 의식성과 정교한 이론체계를 갖춘 사회변혁을 외쳐 질적 전환을 보였고 양적으로도 엄청난 성장을 보였다.
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은 80년대 학생운동의 출발점이었다.
83년 3월 부산 미문화원 사건은 반미의 포문을 연 충격적 사건이었다.
의식화학습과 산발적인 교내시위 투쟁을 주도하면서 5·17이후 지하로 스며들었던 학생운동은 3년여의 회복기를 거쳐 83년말에는 비약적인 수적 성장을 배경으로 학원자율화조치를 이끌어 냈다.
그 결과 운동권은 84년말각 대학에 부활된 총학생회를 배경으로 대규모 연합가두 시위와 점거농성 투쟁을 통해 사회변혁 요구의 목소리를 크게 해 나갔다.
85년 5월23일 80년대 상반기 학생운동이념의 종합인 「민중·민족·민주」 의 삼민이념으로 무장한 전학련 산하 삼민투소속 대학생 73명이 『우리는 미국의 광주항쟁 지원책임을 묻는다』 며 3일동안 벌인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충격파를 던졌다.
광주사태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시작으로 학생운동의 방법론을 들러싸고 벌어진 금년말의 무림과 학림간의 논쟁에서부터 시작된 일련의 팸플릿 논쟁은 85년초까지 끈질기게 벌어져 학생운동이론의 심화·발전을 가져왔다.
이러한 논쟁의 결과 마침내 85년 2학기를 전후해 학생운동 이론은 일련의 총체적인 구조를 갖춘 본격적인 사회변혁 운동의 사상·이론으로의 전환을 보였다.
이러한 와중에서 85년말 일단의 학생그룹이 『한국사회는 미제국주의와 그 앞잡이가 파쇼적으로 지배하는 신식민지 사회다』 라는 선언과 함께 민족해방 민중민주혁명(NLTDR)론을 들고 나와 충격적인 반향을 몰고 왔다.
86년 10월28일의 건국대 사태는 이러한 민족해방(NL)파가 전국적인 조직화를 기하는 와중에서 터진 사건이었고,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NL주사파에 의한 학생운동권 장악의 신호탄이 됐다.
학생운동권은 86년말부터 본격적인 개헌투쟁에 돌입, 87년 2월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으로 얻은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마침내 87년 6월 민주화대투쟁의 승리를 쟁취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해 8월 「자주·민주·통일」을 이념으로 출범한 전대협은 올 7월 임수경양을 평양축전에 참가시킴으로써 통일문제를 크게 대두시켰다.
그러나 학생운동권은 올들어 부산동의대 사태와 설인종군 상해치사사건등에서 보듯이 무절제한 급진화 경향으로 본래의 생명력을 상실할지도 모르는 기로에 서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교육계>
교육계는 일선 평교사들에 의해 줄기차게 진행되어온 「교육민주화운동」 을 둘러싸고 다양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와 서로 심한 갈등과 대립속에 80년대를 보냈다.
교육현장의 제반 모순상에 대한 교사들의 불만은 물론 70년대에도 있었으나 80년대 들어서면서 이같은 불만은 조직적인 교육개혁의 요구로 분출됐다.
전교조의 황호영 대변인(32)은 이같은 이유에 대해▲유신하에서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벌이며 「의식이 깬」 학생운동 세대가 속속 교단에 진출했고 ▲불만이 누적될대로 누적된 끝에 마침내 폭발단계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80년대초 학교별·지역별로 소규모 모임을 통해 현장실천활동 차원에 머물렀던 교원운동이 사회의 주목을 끌면서 전국적으로 통일성을 갖춘 교육개혁 운동으로 승격된 것은 86년 5월10일의 교육민주화 선언에 이어 「민주교육실천협의회」 가 탄생되면서 부터다.
비록 82년의 오송회 사건, 83년의 상록회사건, 85년의 민중교육지사건등 이데올로기 논쟁이 빚어지기는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교육민주화 운동의 관심사는 순수한 교육문제에 국한됐었다.
김인회교수 (연세대·교육학과) 는 『당시 교사들이 요구했던 교육의 중립성보장·교육자치 실시등은 정부당국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이라며 『당국의 계속적인 무성의가 오늘날 교육현장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 이라고 평했다.
87년 민주화 항쟁을 거치며 자신감을 갖게 된 교사들은 「전국교사협의회」 를 발족한 후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교육관계법 개정운동을 전개했다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결국 보다 강력한 힘을 갖춘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을 출범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교사들의 대량구속·해직사태등으로 교육계가 혼란에 휩싸이면서 교육계 내·외부에서 다양한 공방이 본격화됐으며 중·고교생까지 합세, 교육현장은 황페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박용전 경복고교장은 『이에 대한 시비는 90년대 들어 전체사회의 발전방향과 연관해 가려질것』 이라고 말했다.
70년대 재야운동은 정치권에서 밀려난 야당 정치인이나 교수·변호사등 지식인그룹, 천주교와 개신교의 진보적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됐으며 「유신철폐, 민주회복」등 소극적이고 저항적인 측면이 강했다.
80년대 재야운동을 특징지우는 것은 한마디로 「운동집단의 다양화와 민중지향성」일 것이다.
구속자 가족들이 민가협을 만들어 적극적인 양심수 석방운동에 나섰고 출판인들의 출판문화운동협의회, 민중미술협의회, 불교운동연합등 학계와 종교계·예술계·출판계, 심지어 일반 시민들까지도 각종 단체를 만들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였다.
80년대 재야운동의 출발을 알린 것은 83년 김영삼씨의 단식을 계기로 미복권 정치인들이 만든 민추협과 학생·노동운동권 출신들의 민청련(의장 김근태) 이었다.
84년 점차 거세어지기 시작한 학생운동에 힘입어 노동계에서는 청계피복노조재건위가 80년이후 최초의 노동단체로 재건됐고 문화계·출판계·예술계에서도 우후죽순처럼 각종 재야단체가 생겨났다.
광주·부산·대구등 지방도시에서는 지역단위 운동체들이 활발히 움직였고, 85년 민통련 (의장 문익환) 이 출범하면서 재야운동은 일단의 천하통일을 이뤘었다.
80년대 운동단체중 가장 강력했고 목적한 결과를 이끌어낸 것은 87년 박종철군 고문사건을 계기로 5월 발족한 국민운동본부였다.
국민운동본부는 4·13호헌에 분노한 시민들을 『호헌철폐·독재타도』 의 단순한 구호로 결집시켜 6·29선언을 얻어냈다.
6공하의 재야운동은 89년 1월 전민련이 운동권 2세대를 선언하며 출범해 새로운 국면을 맞았지만 장기균씨등 핵심세력이 신당을 결성키 위해 탈피, 세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다.
90년대 재야운동은 이제 저항적인 수준을 넘어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것이다.

<사회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