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불 수교 120돌 기념 조르주 루오전 호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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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들은 전쟁을 증오한다."

한 관람객이 제목을 읽자 주위 사람도 고개 들어 그 작품에 눈을 맞춘다. 어머니와 아이가 서로 감싸안은 모습이 비슷한 판화에는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도 감미로운 일인데'라는 글이 붙어있다.

'산다는 힘든 직업…' 앞에 선 한 노인은 작품 속 벌거벗은 중늙은이를 오래 바라보았다. 슬픈 듯 맑은 얼굴이 닮았다. 흑백 동판화 연작 전체를 아우르는 제목 '미제레레(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가슴을 울린다. "미제레레, 미제레레…" 순례의 발길처럼 보는 이 걸음걸음이 느리다.

4일 오후 대전 서구 만년동 대전시립미술관(관장 이지호)은 깊은 산 속 절 또는 높은 회랑으로 둘러싸인 성당 같았다. 프랑스 화가 조르주 루오(1871~1958)의 회고전이 열리는 전시장은 32도를 넘어선 바깥 세계의 폭염을 서늘하게 만들 만큼 내면을 다스리는 그림이 그득하다.

루오는 광대, 매춘부, 빈민촌 사람들과 예수를 즐겨 그린 화가다. 낮은 이 곁으로 내려앉았던 화가는 없는 이의 삶에서 빛을 보았다. 그 빛은 아름답고 맑은 눈, 둥글고 어진 얼굴, 부드럽고 두터운 검은 선으로 그림에 나타났다.

루오의 눈에 곡마단 소녀는 성모 마리아다. 가장 좋은 직업은 척박한 땅에 씨 뿌리는 농부다. '마음이 숭고할수록 목은 덜 뻣뻣하다'고 여긴 그는 인간을 심판하는 법정의 판사와 검사를 우스꽝스런 망나니처럼 표현했다. 루오가 평생을 바쳐 완성한 '미제레레' 연작 등 240점 작품이 늘어선 네 개 전시실은 '영혼의 자유를 지킨' 한 인간의 일생 그 자체다.

루오는 예수의 삶을 많이 그렸지만 전시장을 찾는 이는 종교의 벽을 넘어선다. 3일 오후에는 정양모 신부가 100여 명 신자와 찾아와 '미제레레'를 해설하며 성경 구절과 작품의 연관 관계를 살폈다. 정 신부는 전시장 맨 마지막에 걸려 있는 '예수 그리스도(수난)'앞에 이르러 아예 자리에 앉아 한동안 묵상에 잠겼다. 탁발 순례단과 함께 들른 도법 스님은 작품 하나하나와 오래 눈을 맞췄다. 몸을 생략하고 주로 얼굴이 강조된 루오의 예수상은 예수와 부처와 마호메트의 경계를 허물어버렸다.

젊은 시절부터 루오를 좋아한 김지하 시인은 루오의 '미제레레'를 "어둠 속에서 빛이 나오고 고통 속에서 은총을 비는 것"이라 풀었다. 비천한 삶과 존엄한 삶을 결합한 빛의 화가라는 것이다. 미술사학자인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는 "루오 화풍의 전체 흐름을 볼 수 있게 잘 꾸민 좋은 전시"라고 칭찬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주변 사람들에게 "이 전시 안 보면 당신 손해"라고 강력 추천사를 던졌다.

전시는 27일까지. 042-602-3200.

대전=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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