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명기의 한중일 삼국지

“수·당 백만 대군 격파” 국가 자존심의 원천

중앙일보

입력 2021.07.30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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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고구려의 후예’ 자처한 조선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는 살수대첩 시각물. 중국 수나라 대군에 맞선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지략이 돋보였다. [사진 전쟁기념관]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는 살수대첩 시각물. 중국 수나라 대군에 맞선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지략이 돋보였다. [사진 전쟁기념관]

“당신 나라에 무슨 장기가 있어서 수당(隋唐)의 군대를 능히 물리칠 수 있었습니까?”라고 묻기에 신은 “지모 있는 신하와 용맹한 장수들은 용병에 뛰어났고, 병졸들은 윗사람을 친애(親愛)했기에 솔선하여 그들을 위해 죽었습니다. 그 때문에 고구려는 한 귀퉁이에 치우친 소국이었지만 천하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쳤던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중국에 대한 맹목적 사대”는 오해
부당한 내정 간섭에 강하게 반발
과거시험 최종 면접서 의견 물어

중국도 15세기까지 ‘상처’로 남아
왜란·호란 이후 얕잡아보기 시작
군사·경제력 증강의 중요성 환기

조선시대 학자이자 관료였던 최부(崔溥·1454∼1504)가 남긴 『표해록(漂海錄)』의 1488년(성종 19) 2월 17일 자에 실려 있는 기록이다. 최부는 1488년 제주도에 출장 갔다가 부친상 소식을 듣는다. 급거 귀경하는 도중 흑산도 근처에서 타고 있던 배가 풍랑에 휘말려 표류하기 시작했고, 끝내는 명의 절강성 영파(寧波) 부근에 불시착했다. 최부는 이후 영파를 출발하여 강남 지역을 지나 북경을 거쳐 귀국했는데, 위의 기록은 소주(蘇州)에서 명의 안찰어사(按察御史)와 나누었던 필담 내용이다.

흥미로운 것은 소주의 안찰어사가 생면부지의 최부를 만나자마자 고구려가 수당의 대군을 물리친 역사를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고구려가 수당의 침략을 격퇴한 것이 15세기 말까지도 중국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사실, 또 당시 중국인이 조선을 고구려의 후계자로 인식하고 있었던 사실 등을 명확히 보여준다.

1388년(고려 우왕 14) 이성계 일파가 요동(遼東) 공략에 나섰다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면서 내세웠던 명분 가운데 하나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거역할 수 없다(以小逆大不可)”는 것이었다. 이어 1392년 건국 이래 조선은 명에 대해 사대(事大·대국으로 섬기는 것)를 표방했다.

요동 공격 추진한 이성계와 정도전

이성계

이성계

하지만 이성계나 조선 지식인이 명에 맹목적이고 무조건 머리를 숙이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명이 조선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내정에 부당하게 간섭하려 할 경우에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1395년(태조 4)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조선이 보낸 표전(表箋·제후가 황제에게 보내는 문서) 내용을 문제 삼아 표전 작성자를 묶어 보내라고 강박하고, 심지어 조선 사신을 죽이기까지 했다. 표전의 작성자는 정도전(鄭道傳)이었다. 명의 협박이 이어지자 조선에서는 이성계와 정도전 등을 중심으로 요동을 공격하여 명의 폭거를 응징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정도전

정도전

주원장이 ‘표전 문제’를 트집 잡아 조선을 위협하고 정도전 등이 요동 공격으로 그에 맞서려고 했던 배경에는 모두 고구려에 대한 기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주원장은 고구려의 계승자인 조선이 요동에 대해 영토적 야심을 드러내지 않을까 의심했고, 정도전 등은 고구려의 고토인 요동을 언젠가는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요동을 되찾을 가능성은 미약해졌지만 ‘강국 고구려’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기억과 선망은 면면히 이어진다. ‘수당의 백만 대군을 격퇴했다’는 사실은 고구려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자랑스러운 기억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고구려가 수십만 대군을 보유했던 사실, 성(城)을 쌓고 지키는 데 뛰어났던 사실 등은 조선 지식인에게 자부심의 근거이자 본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그와 관련하여 전시(殿試·과거 합격자들의 최종 면접시험)에서 고구려가 수당을 물리쳐 천하의 강국으로 불릴 수 있었던 원인을 묻는 문제가 출제됐다. 양성지(梁誠之·1415∼1482)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은 물론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영양왕(嬰陽王)을 기리는 사당을 세우라고 촉구했다. ‘고구려의 후예’ 조선의 신하로서 자존의식이 강했던 그는 15세기 중반 명이 보내온 문서에서 조선을 ‘너(爾汝)’라고 쓴 것에 통분하여 명을 상대로 시정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주원장

주원장

명의 지식인들은 전통적으로 고구려를 ‘억세고 만만찮은 상대(勁敵)’로 인식했다. 따라서 고구려의 후예인 조선 또한 가볍게 볼 수 있는 나라는 아니라고 여겼다. 주원장이 ‘표전 문제’ 등을 계기로 조선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던 배경에는 ‘고구려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가 본 조선 “문약에 빠져 쇠망”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에 있는 장군총. 고구려의 기상을 떨친 장수왕, 혹은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중앙포토]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에 있는 장군총. 고구려의 기상을 떨친 장수왕, 혹은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중앙포토]

1592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고구려의 후예’ 조선의 실상이 여지없이 드러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뀐다. 명 조정과 조선에 참전했던 명군 지휘부는 무엇보다 임진왜란 초반 조선이 일본군에 일방적으로 밀렸던 사실에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 ‘고구려의 후예’로서 만만찮은 조선이 불과 17일 만에 일본군에 수도를 넘겨주고 선조가 서북단의 의주까지 피신했던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당시 요동 지역에서는 조선이 고구려의 고토 요동을 되찾기 위해 고의로 일본군을 끌어들였다는 유언비어가 돌았을 정도였다.

전쟁을 계기로 조선의 허약한 군사력과 경제력이 폭로되자 명의 신료들과 명군 지휘부는 ‘고구려의 후예’가 쇠약해진 원인을 찾기 위해 부심한다. 그 과정에서 대다수 명 측 인사들은 ‘무비(武備)를 방기하고 문약(文弱)에 빠졌던 것’을 조선이 쇠약해진 원인이자 일본의 침략을 초래한 배경으로 지목했다. 명군 지휘부 가운데는 조선을 아예 ‘쇠망의 기미가 누적된 나라(積衰之邦)’로 규정하고 “임금과 신하가 시주(詩酒)에 빠져 태평시대를 즐기다가 나라를 망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명군 지휘부는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는 조선’은 자강(自强)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명의 전쟁 지휘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강요하기도 했다. 1593년 이후 명군 지휘부가 조선의 의견을 무시하고 일본과의 휴전 협상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던 데는 이 같은 인식과 태도 변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요컨대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은 ‘고구려의 후예’이자 ‘만만찮은 나라’에서 ‘보잘것없는 약소국’으로 전락한다. 중국인이 지녔던 ‘고구려 트라우마’도 소멸하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남긴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기도 전인 17세기 초반, 조선은 새롭게 떠오르던 만주족의 군사적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또 다른 위기 상황을 맞아 조선 지식인의 ‘강국’ 고구려에 대한 선망은 더욱 절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발생 직전 이준(李埈·1560∼1635)은 고구려가 보여줬던 상하의 단결과 저항정신을 계승하여 무사안일에 빠져 버린 현실을 바로잡아야 만주족의 위협을 이겨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조선은 1637년 만주족의 청에 무릎을 꿇고 만다.

숙종 이후 을지문덕 숭앙사업 펼쳐

을지문덕

을지문덕

‘오랑캐’ 청에 항복했다는 정신적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던 숙종 대 이후 고구려에 대한 기억이 다시 환기된다. 조선이 오랫동안 ‘문약’에 빠져 군사력이 쇠약해졌다는 반성이 제기되고, 살수대첩의 영웅 을지문덕(乙支文德)에 대한 숭앙 사업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고구려 관련 언급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를 강국으로 찬양하는 한편에서 ‘고구려가 강포(强暴)해서 신라보다 먼저 망했다’는 인식이 자주 제기됐던 점이다. 남구만(南九萬·1629∼1711)은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강국이지만 말년에 군신들이 실도(失道)함으로써 수당에 밀리게 되고 끝내는 나라가 망해 백성들이 중국 내지로 끌려가게 됐다’고 비판한 바 있다. 고구려가 수당의 대군을 격퇴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수준을 넘어 멸망의 원인으로서 집권층의 분열 등 내부 모순을 지적하고 반면교사로 삼으려는 인식이었다.

여하튼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고구려는 특별한 존재였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인 데다 군사력이 미약하여 시련을 겪고 굴욕을 체험했던 그들에게 수당의 백만 대군과 맞섰던 고구려의 역량과 결기는 선망의 대상이자 자부심의 원천이었다.

요즘은 어떤가. 힘이 부쩍 커지면서 전 세계를 향한 중국의 외교적 언사가 날로 거칠어지고 있다. 연초에는 ‘김치 공정’과 관련하여 한국에 대한 폄하가 문제가 되더니 최근에는 주한 중국대사의 신문 기고와 발언이 ‘내정 간섭’ 논란까지 낳고 있다. 중국과의 우호가 중요하더라도 한국에 대한 부당한 폄하와 무시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비판하고 당당하게 맞서는 자세가 필요하다. 조선 지식인들이 선망했던 고구려의 역량과 결기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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