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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의 다이아” 힌두교인 간디는 왜 성경에 감동했나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2021.07.24 00:00

업데이트 2021.07.24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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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 신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그리스도교의 성경을 깊이 읽었다. 간디는 “예수께서 말한 ‘산상수훈’은 종교 중의 종교다. 모든 종교의 다이아몬드다”라고 표현했다. 간디는 왜 남의 종교인 그리스도교 경전에 등장하는 산상수훈이 “모든 종교의 다이아몬드”라고 평했을까.

힌두교 신자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그리스도교 성경에 담긴 예수의 산상수훈에 대해 '종교 중의 종교'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힌두교 신자였던 마하트마 간디는 그리스도교 성경에 담긴 예수의 산상수훈에 대해 '종교 중의 종교'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산상수훈이 마음과 비움,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얽힌 ‘삼각함수’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산상수훈은 하느님 나라의 문턱을 넘어가는 일종의 이정표다.

⑩힌두교 신자인 간디가 성경 읽고 감동한 까닭은?

나는 갈릴리 호숫가로 갔다. 갈릴리 호수는 해뜰녁과 해질녘에 유독 아름다웠다. 호숫가에서는 새들이 끊임없이 지저귄다. 철새들이 줄지어 호수를 가르기도 한다. 호수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어찌 보면 높은 언덕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낮은 산 같기도 하다.

호수 북동쪽으로는 저 멀리 헤르몬 산이 보인다. 겨울과 봄에는 정상의 세 봉우리가 흰 눈으로 덮여 있다. 갈릴리 호수에서 보면 마치 만년설 같다. 이스라엘 젊은이들은 거기서 스키를 즐긴다. 헤르몬 산의 높이는 무려 2814m. 백두산(2744m)보다 조금 더 높다. 헤르몬 산에서 물이 흘러내려 와 갈릴리 호수를 만들고, 호수의 물은 다시 흘러가 요르단 강이 된다. 그 강이 광야에 이르러 사해가 된다.

갈릴리 호수 너머 저 멀리 헤르몬 산이 보인다. 정상 근처에는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마치 만년설처럼 보인다. 헤르몬 산에서 흘러내린 물로 인해 갈릴리 호수가 생겨났다.

갈릴리 호수 너머 저 멀리 헤르몬 산이 보인다. 정상 근처에는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마치 만년설처럼 보인다. 헤르몬 산에서 흘러내린 물로 인해 갈릴리 호수가 생겨났다.

갈릴리에 머물 때 예수는 수시로 산에 올랐다. 산 위에 올라가면 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호수 서쪽의 티베리아스, 동쪽의 거라사, 북쪽의 가버나움과 타브가도 한눈에 보인다.

성경에는 예수가 종종 산에 올라 고요한 곳으로 갔다고 돼 있다. 그곳에서 홀로 기도를 한 뒤 내려오곤 했다. 갈릴리 일대를 돌면서 예수는 몸이 아픈 이, 마음이 아픈 이들을 치유했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남쪽의 예루살렘은 물론, 유다 지역과 데카폴리스, 강 건너 요르단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많을 때는 수천 명씩 모였다. 사람이 너무 많아지자 예수는 산으로 올라갔다. 당시에는 마이크도 없고 스피커도 없었다. 예수는 어떻게 그 많은 군중이 들을 수 있도록 메시지를 전했을까. 크게 고함이라도 질렀을까. 아니면 종이를 말아 확성기라도 만들었을까.

현지에서 만난 유대인이 내게 흥미로운 설명을 해주었다.

“이스라엘은 햇볕이 뜨거워요. 낮에는 땅의 온도가 갈릴리 호수의 수온보다 높아집니다. 그러니 바람이 호수에서 산 쪽으로 불지요. 아래에서 위로 부는 거죠. 밤에는 정반대가 됩니다. 땅의 온도가 호수의 수온보다 더 떨어지고, 그래서 밤에는 산에서 호수 쪽으로 바람이 불어요.”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서 예수는 산상수훈을 설했을 터이다.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예수는 어떻게 목소리를 전달했을까.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서 예수는 산상수훈을 설했을 터이다.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예수는 어떻게 목소리를 전달했을까.

마침 낮이었고 바람이 호수에서 산으로 불고 있었다. 나는 실험을 해봤다. 저만치 아래에 서 있는 사람에게 평소 목소리로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바람을 타고 위쪽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신기했다. 마치 그리스 로마 시대의 원형극장에서 스피커 없이 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말이다.

예수는 이런 원리를 이용하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언덕 저 아래 어디쯤 예수가 서 있었으리라. 사람들은 산 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예수를 내려다봤겠지. 귀를 쫑긋 세우면서 말이다. 그렇게 예수는 자신의 음성을 바람에 실어서 띄워 보냈을 터이다. ‘산상수훈(山上垂訓, Sermon on the Mount)’이라 불리는 이른바 ‘예수의 행복론’을 말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믿던 행복론은 달랐다. 그들은 모세가 하늘로부터 받은 율법을 철통같이 지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겼다. 유대인들은 문자 하나하나에 집착하고 율법을 따졌다.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행복론’은 상식 밖이었다. 그야말로 파격이자 혁명이었다. 예수는 율법에 대한 그 모든 문자주의와 형식주의를 파괴하며, 살아서 꿈틀대는 ‘실질적인 행복론’을 사람들에게 내밀었다. 그 첫 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예수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주변 나라에서도 찾아온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산상수훈을 설했다. 산상수훈을 다룬 코시모 로셀리의 작품이다.

예수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주변 나라에서도 찾아온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산상수훈을 설했다. 산상수훈을 다룬 코시모 로셀리의 작품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복음 5장 3절)

무슨 뜻일까. 요즘 사람들도 그 구절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니 2000년 전에는 오죽했을까. 사람들은 따진다.

“마음은 부자여야 하는 것 아닌가. 실제로 가진 게 없더라도 마음만이라도 부자여야 푸근할 텐데. 예수님은 어째서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고 했을까. 그래야 행복하다고, 하늘나라까지 그들의 것이라고 했을까. 도통 알 수 없는 말이군.” 이렇게 푸념한다.

예수가 말한 ‘가난한 마음’이란 대체 뭘까. 신약성경은 처음에 그리스어로 기록됐다. 그리스어 성경에서 ‘마음’에 해당하는 단어는 ‘프뉴마(pneuma, 영어로 spirit)’이고, ‘가난’은 ‘프토코스(ptochos)’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그리스어로 ‘프토코이 투 프뉴마티(ptochoi to pneumati)’이다.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뜻한다.

이 대목에서 사람들은 다시 따진다. “아니, 더 헷갈린다. 영적으로 가난한 게 대체 뭔가. 영적으로 부유할 때 하늘나라에 더 가까워지는 게 아닌가. 영적인 가난. 너무 추상적이어서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갈릴리 호수 근처의 산촌에 있는 옛 마을의 유적지. 예수 당시에도 이 마을은 있었다. 예수도 이곳에 와서 유대 회당에서 설교를 하곤 했다.

갈릴리 호수 근처의 산촌에 있는 옛 마을의 유적지. 예수 당시에도 이 마을은 있었다. 예수도 이곳에 와서 유대 회당에서 설교를 하곤 했다.

호숫가 언덕으로 바람이 불었다. 부드러웠다. 그 바람을 안고서 눈을 감았다. 예수가 말한 ‘가난’에는 이유가 있다. 가난하고 가난하고 또 가난해져서 결국 무언가를 드러내기 위한 가난이다. 아무런 방향성도 없이 한없이 궁핍해지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가난에 가난을 더하고, 그 가난에 다시 가난을 더해서 예수가 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예수는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라고 했다. 다시 말해 마음의 창고를 비우라는 말이다. 왜 그랬을까. 우리의 창고는 늘 무언가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게 뭘까. 가지려는 마음과 가지고 싶은 대상에 대한 틀어쥠이다. 한 마디로 ‘집착(Attatchment)’이다. 접착제처럼 끈적이면서 내 마음의 창고를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집착이다.

우리가 무언가에 집착할 때 마음의 창고가 찬다. 집착을 비우면 창고도 비워진다. 그 이치를 아는 예수가 말했다. “마음을 가난하게 하라!” 불교에서는 이를 “마음을 내려놓으라”라고 표현한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 나라의 문턱을 넘고자 한다. 불교는 불국토(佛國土, 부처님 나라)의 문턱을 넘고자 한다. 어찌 보면 그 문턱을 넘어가는 첫 번째 징검다리가 서로 닮았다. ‘마음의 창고를 비워라.’

예수가 산상수훈을 설하는 모습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행복의 길을 강조했다.

예수가 산상수훈을 설하는 모습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행복의 길을 강조했다.

갈릴리 주변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다. 권력과 재력을 모두 갖춘 어떤 사람이 예수에게 물었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누가복음 18장 18절)

예수는 “간음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라며 구약의 십계명을 일러주었다. 그러자 권력가는 “그건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습니다”라고 대꾸했다.
권력가는 자기 안의 창고를 보지 못했다. 그에게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에게 아직 모자란 것이 하나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누가복음 18장 22절)

이 말을 듣자 비로소 그 사람은 낙담했다. 그는 굉장한 부자였기 때문이다. 이어서 예수는 말했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누가복음 18장 24~25절)

갈릴리 호수의 나뭇가지 위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있다. 갈릴리 호수는 아침과 저녁에 특히 아름답다.

갈릴리 호수의 나뭇가지 위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있다. 갈릴리 호수는 아침과 저녁에 특히 아름답다.

삼성의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도 같은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타계하기 한 달 전에 가톨릭의 고 박희봉 신부에게 건넨 종교적 내용의 질문지에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약대(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이 담겨 있다. 예수가 말한 ‘부자’의 속뜻은 무엇일까. 정말 재산이 많은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가기가 어려울까.

사람들은 오해한다. 예수의 메시지를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 예수는 왜 권력가에게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라”라고 했을까.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계명을 지키고 율법을 지킨다는 뿌듯함으로 바깥만 바라보는 그의 눈을 자기 안으로 돌리기 위해서다. 눈을 돌려서 마음의 창고를 보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모든 것을 던지라고 했다.

다시 말해 “마음의 창고를 다 비우라”고 했다. 예수는 마음 창고에 대한 ‘전면적 포맷’을 요구한 것이다. 모든 바탕을 하얗게 바꾸면 그 위의 까만 점들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자신만만하던 권력가는 그제야 절망한다. 자신이 틀어쥐고 있던 집착이 비로소 보였기 때문이다. 모든 걸 던지라는 말 앞에서 ‘도저히 던질 수 없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아침에 해 뜰 무렵의 갈릴리 호수. 새들이 호수의 수면 위를 비행하고 있다. 건너편 산 위로 해가 올라오고 있다.

아침에 해 뜰 무렵의 갈릴리 호수. 새들이 호수의 수면 위를 비행하고 있다. 건너편 산 위로 해가 올라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설한 ‘가난한 마음’이 아닐까. 가령 마음의 창고를 비운 백만장자와 돈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한 걸인 중에 누가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울까. 누가 더 가난한 마음을 가진 걸까. 가진 게 많다고 반드시 집착이 많은 건 아니다. 또 가진 게 없다고 꼭 집착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예수가 제시한 잣대는 ‘재산의 총액’이 아니라 ‘집착의 총액’이었다.

〈11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백성호의 예수뎐, 지난 글들

짧은 생각

고(故) 차동엽 신부에게 ‘산상수훈’을 물은 적이 있습니다. 차 신부님은 신약성서의 두 기둥인 ‘주기도문’과 ‘산상수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기도문은 수직선이다.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말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성 교본’이다. 산상수훈의 팔복은 수평선이다. 우리에게 수평적인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한 마디로 ‘실존 교본이자 생활 교본’이다.”

이 말을 듣고 저는 물었습니다.

이 생활 교본의 종점은 어디인가.
 “행복이다. 팔복은 모두 ‘행복하여라, ~한 사람들!’로 시작한다. 현대인은 다들 고민한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예수님께선 거기에 대한 답을 던지셨다. 삶의 목표를 ‘행복’으로 정한 거다.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8가지 길을 제시한 거다.”
 그 길이 추상적이진 않나.
 “아니다. 팔복은 관념적인 길이 아니다. 매우 구체적인 길이다. 그래서 ‘팔복’은 아름다운 시(詩)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강령이다. 굳이 시라고 하자면 현자(賢者)의 시에 해당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헛다리 짚지 않게, 시간을 허송하지 않게, 거짓에 속지 않게 도와준다. 그래서 팔복이 행복으로 가는지름길이 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어떤 행복인가.
 “‘행복(Happiness)’의 어원은 ‘Happen(일어나다ㆍ발생하다)’이다. 행복은 발생하는 것이다.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누가 발생시키느냐. 바로 나 자신이다. 이건 행복에 대한 원리이자 법칙이다. 테크닉이 아니다. 예수님께선 그렇게 행복을 발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마음을 알려주신 거다.”
 그럼 ‘마음이 가난한’게 뭔가.
 “먼저 예수님께서 사용했던 히브리어를 보자. ‘가난’은 ‘에비온(ebiyon)’이다. 이 말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가난’을 뜻한다. 성서에선 고아들, 과부들, 나그네들에게 이 말이 종종 쓰였다. 요즘 말로 하면 갈 데도 없고, 기댈 데도 없는 노숙자쯤 된다. 그런 절대적 가난을 가리킨다.”
 그럼 ‘물질적 가난’을 뜻하나.
 “아니다. 그렇게 의미가 얕지 않다. 이건 ‘영성적인 가난’을 뜻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도 ‘마인드(Mind)’가 아니라 ‘영(Spirit)’이란 의미다. 구약 시편의 영성가들은 ‘저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저를 돌봐주세요. 주님의 도움 없이 저는 살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영적인 가난은 그런 가난이다.”
 ‘영적인 가난’을 한마디로 해달라.
 “하늘의 은혜, 자연의 은혜에 맡기면서 살려는 자세다. 내가 인공적으로 나의 안전을 구하지 않고, 하늘과 자연에 맡기고 의지하면서 살려는 태도다.”
 ‘영적인 가난’이 왜 중요한가.
 “사람들은 다들 ‘내 삶의 안전장치’를 마련한다. 돈을 통해, 직장을 통해, 가족을 통해, 명예를 통해 그걸 구축한다. 그리고 안전장치가 버텨주길 바란다. 그런데 이런 장치는 결국 무너지게 마련이다. 궁극적 안전장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가난’의 바탕에는 무너지지 않는 안전장치가 있다.”
 구체적인 일상에선 어떻게 써먹나.
 “이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누리려고 하는 거다. 내게 주어진, 이미 주어진 이 하늘의 은혜, 자연의 은혜를 누리는 거다. 그게 영적으로 가난한 거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 되나.
 “그렇다. 우물 안 개구리와 우물 밖 개구리가 있다. 그들이 보는 하늘은 다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집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보고 행복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우물 밖 개구리는 하늘에 달린 별을 보고 행복해한다. 우물 밖 하늘을 보면 다시 우물 속으로 들어가도 개구리의 삶은 달라진다. 여유 있고, 지혜롭고, 넉넉하고, 자∼알 살 수 있게 된다.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차 신부님은 서울의 달동네 난곡에서 자랐습니다. 가파른 언덕길에서 연탄 리어카를 밀면서 말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간이 안 좋았습니다. 가끔 점심 식사를 함께 할 때도, 늘 집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따로 가져왔습니다. 간의 해독력이 상당히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도 척척 받아내던 차 신부님이 종종 생각납니다. 그래서 오늘 그의 안목과 통찰을 다시 길어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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