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인간인가 신인가…미켈란젤로 ‘천지창조’가 준 혼선[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2021.05.29 05:00

업데이트 2021.05.29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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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떠난 버스가 베들레헴에 도착했다. 해발 770m의 산악지역에 있는 마을이다. 차에서 내렸다. 베들레헴은 ‘베들(House)+레헴(Bread)’으로 ‘빵 만드는 집’이란 뜻이다.

이곳은 그리스도교의 성지 중의 성지다. 가톨릭 신자들도, 크리스천들도, 딱히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베들레헴을 찾아온다. 크리스마스 때마다 보는 풍경, 말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의 모습. 그 역사적ㆍ공간적 배경이 바로 여기다.

이스라엘에 있는 예수 탄생지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건너갈 때는 삼엄한 경계와 초소를 통과해야 했다. 사진은 베들레헴에 있는 오래된 성이다.

이스라엘에 있는 예수 탄생지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건너갈 때는 삼엄한 경계와 초소를 통과해야 했다. 사진은 베들레헴에 있는 오래된 성이다.

②예수는 사람의 아들인가, 신의 아들인가

지금은 마구간이 없었다. 대신 예수가 태어난 자리에 교회가 서 있었다. 약 1500년 전에 세워진 ‘예수탄생 교회’다. 325년에 지었다가 파괴되고 529년에 재건됐다. 역사적 시기가 선뜻 감이 오지 않는다. 529년이면 고구려 안장왕이 백제 성왕과 싸웠던 때다. 예수탄생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세월 문을 열고 있는 교회 중 하나다.

교회 입구가 특이했다. 성벽 아래에 난 작고 네모난 구멍이 입구였다. 높이는 1.2m정도에 불과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면 누구나 머리를 숙여야 했다. 말을 타고 교회 안에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입구를 낮고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예외는 없었다. 순례객들은 다들 머리를 숙였다. 그건 일종의 ‘내려놓음’이기도 했다. 자신을 내려놓은 곳, 거기야말로 신을 만나는 곳이니까.

예수 탄생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면 낮고 작은 출입구를 통과해야 한다. 아무리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도 말에서 내린 뒤 고개를 숙이고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예수 탄생 교회 안으로 들어가려면 낮고 작은 출입구를 통과해야 한다. 아무리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도 말에서 내린 뒤 고개를 숙이고서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1500년 전에 지은 교회의 실내 양식은 아주 독특했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처럼 40여 개의 굵다란 기둥들이 양옆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앞에는 제단이 있고, 정교회 성직자들이 미사 중이었다.

교회 아래로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그곳에 예수가 태어났다는 ‘바로 그 장소’가 있었다. 2000년 전 여기가 마구간이었을 때, 예수가 태어난 지점 말이다. 그곳에는 사람들의 긴 줄이 있었다. 맨 앞의 사람은 바닥에 엎드려 뭔가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게 뭐지?’ 궁금해하며 나도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한참 후에 순번이 왔다. 바닥에는 별 모양의 장식이 있었다. 그 별 한가운데 손바닥만 한 작고 동그란 유리창이 있었다. 그 창을 통해 들여다 보이는 곳이 예수가 태어난 ‘바로 거기’라고 했다. 선 채로는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야 했다. 눈을 유리창에 바짝 갖다 댔다. 안을 들여다봤다. 새까맸다. 새까만 어둠, 그뿐이었다.

줄 선 사람들이 많아 오래 볼 수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탈하고 당혹스러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뒤로 돌아서는데 문득 성서 구절이 뇌리를 때렸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복음 1장3절)

그랬다. 저 어둠, 작은 구멍 속의 저 어둠. 그건 태초의 어둠과 통했다. 태초의 어둠이 뭔가. 내가 나고, 당신이 나고, 세상이 나고, 이 우주가 나온 자궁이다. 그런 천지창조의 근원이다. 거기야말로 예수가 온 곳이다.

예수가 탄생한 자리라고 전해지는 곳을 한 순례객이 바닥에 난 구멍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다.

예수가 탄생한 자리라고 전해지는 곳을 한 순례객이 바닥에 난 구멍을 통해 들여다보고 있다.

불교에서는 그걸 ‘공(空)’이라 부른다.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는 공이 아니다. 모든 색(色ㆍ형상)이 태어나서, 작용하고, 돌아가는 만물의 본향(本鄕)이다.

숫자로 표현하면 ‘0’이다. 태초의 어둠도 ‘0’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무한 ‘0’이 아니다. 없음으로 차 있기에 ‘진공묘유(眞空妙有)’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가 다석(多夕) 유영모는 신을 부를 때도 ‘없이 계신 하느님’이라 불렀다. 요한복음은 말한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아담과 이브가 그분을 통해 생겨났듯이, 우리도 그분을 통해 생겨났다. 결국 우리의 몫이다.

나의 가족과 친구 속에서,
저 나무와 새 울음 속에서,
저 바람과 달 속에서,

‘없이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일 말이다.

예수탄생 교회를 나왔다. 팔레스타인 청년이 다가와 “헤이, 브라더!”하며 기념품을 사라고 했다. 나는 ‘브라더!’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그들은 처음 보는 낯선 남자에게도 “브라더!”라고 불렀다. 이 한 마디가 많은 걸 떠올리게 했다.

예수가 탄생한 장소 위에 지어진 예수탄생교회. 325년에 지었다가 파괴되고 529년에 재건됐다.

예수가 탄생한 장소 위에 지어진 예수탄생교회. 325년에 지었다가 파괴되고 529년에 재건됐다.

성서에는 ‘예수의 형제’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온 예수를 향해 마을 사람들이 떠드는 이야기가 마가복음서에 적혀 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마가복음 6장3절).

예수는 맏이였다. 그에게 동생과 누이가 있었을까. 민감한 논쟁거리다. 현대 신학자들은 상당수 ‘예수에게 형제가 있었다’고 본다.

반론도 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형제뿐 아니라 사촌들도 다 ‘브라더(Brother)’라고 불렀다.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형제’는 친형제가 아니라 사촌이다”고 주장하는 전통적 시각도 강하다.

그럼 이게 왜 ‘논쟁의 뇌관’일까. 이유가 있다. 예수가 ‘사람의 아들’인가, 아니면 ‘신의 아들’인가. 그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결혼한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의 동생들을 낳는 것은 어찌 보면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을 테니.

그런데 신의 아들로 보면 적잖이 불편해진다. 성령으로 잉태한 적이 있는 마리아의 몸에서 요셉의 자식들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수를 신학적 용어로 ‘하느님의 독생자(獨生子)’라 표현한다. ‘외아들’이란 뜻이다. ‘하느님의 외아들’에게 아버지가 다른 형제가 있다는 설정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마리아가 평생 순결을 지킨 처녀라는 ‘평생 동정녀론’이 가톨릭에는 강하게 남아 있다.

아기 예수를 눕혔다고 전해지는 말 구유가 있던 장소다. 지금은 그 위에 초를 켜놓고 있다.

아기 예수를 눕혔다고 전해지는 말 구유가 있던 장소다. 지금은 그 위에 초를 켜놓고 있다.

성서에는 예수에게 네 명의 형제와 적어도 두 명의 누이가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나사렛 고향 사람들은 예수를 ‘신의 아들’로 보지 않았다. 그저 ‘목수의 아들’로 봤다.

고향 사람들은 유대교 회당에서 예수가 풀어놓은 지혜에 놀라면서도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에게 예수는 그저 이웃 사람 마리아의 아들일 뿐이었다. 남동생들과 누이들의 형이자 오빠일 뿐이었다.

예수가 직접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마가복음 6장4절)고 토로할 정도였다. 유대교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받아들인다.

정작 예수는 어땠을까. 자신을 스스로 무엇이라 불렀을까. 예수는 평소 자신을 지칭할 때 ‘메시아(구원자)’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인자(人子)”라고 불렀다. 글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란 뜻이다.

그런데 ‘인자(人子)’의 뜻은 깊다. 그 울림도 크다. ‘인자’가 히브리어로는 ‘Aben adam(아담의 아들)’이다. 예수는 자신을 지칭하며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정확하게 ‘아담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예수는 왜 자신을 ‘아담의 아들’이라고 불렀을까.

미켈란젤로가 바티칸에 있는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미켈란젤로가 바티칸에 있는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사람들은 생각한다. 신의 외모가 인간의 외모와 똑같을 거라고. 우리처럼 눈이 있고, 코가 있고, 팔다리가 있을 거라고. 구약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신은 자신의 형상을 본 따 인간을 빚었다고. 미켈란젤로의 성화 ‘천지창조’를 봐도 하느님은 흰 머리칼을 휘날리는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인간의 형상은 신의 형상에서 따왔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한 고(故) 차동엽 신부는 “‘형상’이란 단어에 주목하라”고 말했다. 성서에 기록된 ‘형상’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셀렘(Selem)’이다.

'셀렘’은 본질 혹은 속성이 닮았을 때 쓰는 말이다. 겉모양만 붕어빵처럼 똑같이 생긴 ‘형상’을 말할 때는 히브리어로 ‘데무트(Demut)’를 쓴다.

결국 성서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외모가 아니라 속성을 본 따 인간을 지었다’는 뜻이다. 차 신부는 생전에 “하느님을 의인화하고 인격화하며 ‘하느님은 이런 존재’라고 못 박는 건 곤란하다. 그건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인간의 3차원적이고 편협한 생각 속에 가두는 일”이라고 말했다.

성장한 예수가 하늘의 메시지를 전했던 이스라엘 북부의 갈릴리 호수. 이 언덕에서 예수는 산상수훈을 설했다.

성장한 예수가 하늘의 메시지를 전했던 이스라엘 북부의 갈릴리 호수. 이 언덕에서 예수는 산상수훈을 설했다.

예수탄생 교회의 제단 앞으로 갔다. 눈을 감았다. 예수가 온 곳은 어디일까, 또 예수가 간 곳은 어디일까. 구약 창세기의 구절을 다시 떠올렸다.

하느님은 당신의 속성(Selem)대로 사람을 지으셨다(구약 창세기 1장27절).

그러니 아담 안에 신의 속성이 흐른다.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아담의 아들”이라고 한 까닭도 그랬다. 누군가 예수에게 물었다. 하느님을 보여 달라고. 그분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달라고.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나를 보는 것이 곧 아버지(하느님)를 보는 것이다.” 예수는 있는 그대로 말했다. 달리 말할 수가 없었을 터이다. 자신 안에 가득 찬 ‘하느님의 속성’이 바로 예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게 예수의 진정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버스는 덜컹거리며 베들레헴을 떠났다.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다시 물음이 올라왔다. 예수는 인간인가, 아니면 신인가. 그랬다. 아담의 아들 예수. 그는 신을 품은 인간이자 인간을 품은 신이다.

200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예수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의 아들인가.

〈3회에서 계속됩니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짧은 생각
하느님(하나님)은 어떻게 생긴 분일까.

이런 물음을 던져봅니다. 하얀 머리카락과 긴 수염을 휘날리는 인자하신 할아버지. 우리는 그런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만약 꿈에서 그런 분을 만났다면 “나는 하느님을 만났어”라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은 그렇게 생긴 분이겠지”라고 정해놓고 있으니까요.

따져보면 딱히 근거가 없습니다. 그럼 많은 사람이 왜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는 걸까요. 저는 미켈란젤로의 성당 벽화 ‘천지창조’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모습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진흙으로 빚은 아담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할아버지 하느님의 이미지 말입니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하느님은 그렇게 생기셨을 거야”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천지창조'에서 아담을 창조하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미켈란젤로의 작품 '천지창조'에서 아담을 창조하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정말 궁금합니다. 하느님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요. 영성의 눈이 깊은 이재철 목사(전 100주년기념교회 담임)에게 이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대답은 이랬습니다. “하나님은 차원을 넘어서 계신 분이다. 3차원, 4차원이 아니라 9차원, 10차원도 넘어서 계신 분이다. 그렇게 무한하신 분이다.”

오스트리아 성서신학을 전공한 고(故) 차동엽 신부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다. 차 신부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차원을 넘어서 계신 분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이렇게 생긴 분이야, 저렇게 생긴 분이야라고 단정하면 어떻겠나. 초월적 존재인 하느님을 우리의 좁은 3차원적 생각 속에 가두는 일이 되고 만다.”

한 분은 목사, 한 분은 신부였지만 대답은 통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희고 긴 수염과 머리칼을 휘날리는 인자하신 할아버지 하느님. 그건 우리가 만들어낸 이미지입니다. 하나의 상(像)입니다. 본래부터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내가 만든 하느님입니다. 그게 뭘까요. 다름 아닌 ‘우상(偶像)’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수도(修道)가 뭔가요? 십자가를 통해 내 안의 잣대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그걸 통해 마음이 자꾸 가난해지는 길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는 게 뭘까요? 내 안의 욕망과 내 안의 집착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걸 통해 생겨난 가난의 여백을 통해 우리는 신의 속성과 연결됩니다.

그런데 ‘우상(偶像)’을 세우면 어떻게 될까요. 거꾸로 가게 됩니다. 역주행을 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더 멀어지게 됩니다. 왜냐고요? 우상은 대부분 나의 욕망을 성취할 창구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스라엘 북부인 갈릴리 호수 일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하늘의 소리'를 전했다.

예수는 이스라엘 북부인 갈릴리 호수 일대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하늘의 소리'를 전했다.

구약의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당신의 모습을 본 따 사람을 지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겉모습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외양이 닮았다고 봅니다. 하느님을 눈ㆍ코ㆍ입과 머리, 팔다리를 가진 인격적 존재로 의인화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은 달리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은 건 겉이 아니라 속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단어는 겉모습을 뜻하는  ‘데무트(Demut)’가 아니라 속성ㆍ성질을 뜻하는  ‘셀렘(Selem)’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하느님의 겉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의 속성을 닮은 존재입니다.

이걸 알면 성경이 달리 보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예수의 속성은 신의 속성이니, 너희도 신의 속성을 회복해라. 그럼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도 내 안에 거하게 된다. 물과 물이 통하고, 기름과 기름이 통하듯이 말입니다.

이제 명확해집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을까요. 저는 이유가 하나라고 봅니다. 우리의 속성을 신의 속성으로 바꾸기 위함입니다. 신의 속성을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지을 때,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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