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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건 예수의 겉모습일까, 아니면 속모습일까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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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나는 갈릴리 호수로 갔다. 2000년 전에 갈릴리 호수 서쪽 해안에 마을이 하나 있었다. 그 마을의 이름이 ‘막달라(Magdala)’였다. 그렇다. ‘막달라 마리아’할 때의 막달라다. 가톨릭에서는 막달레나라고 표기한다. 『탈무드』에서도 이 지역명이 등장한다. 『탈무드』의 지명은 ‘막달라 누나이야(MagdalaNunayya)’다. 그리고 막달라의 그리스어 지명은 ‘다리크아에(Tarichaea)’로 생선 제염소라는 뜻이다.

당시 막달라에는 어부들이 잡은 생선을 소금에 절이는 커다란 제염소가 있었을 터이다. 막달라는 갈릴리 어업의 중심이 되는 어촌이었다. 지금은 갈릴리 호수 서쪽 편에 그런 마을은 없었다. 막달라 마을의 위치는 현재 호텔과 리조트가 들어서 있는 티베리아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지금은 그 자리에 갈대와 풀들만 무성했다.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의 초상화. 렘브란트는 유대인 마을에 직접 살면서, 유대인 고유의 생김새를 반영해 예수의 초상화를 그렸다.

화가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의 초상화. 렘브란트는 유대인 마을에 직접 살면서, 유대인 고유의 생김새를 반영해 예수의 초상화를 그렸다.

⑦ 우리가 믿는 건 예수의 겉모습일까, 아니면 속모습일까

갈릴리 호숫가를 걸으며 생각했다. 그렇다면 신약성서에는 ‘마리아’가 어떻게 묘사돼 있을까. 누가복음에 ‘막달라 마리아’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예수가 여러 마을을 다니며 메시지를 전할 때 12사도가 함께 다녔고, 그때 여자들 몇 명도 함께했다고 돼 있다.

갈릴리 호수는 바다처럼 넓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라고 불렀다.

갈릴리 호수는 바다처럼 넓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갈릴리 호수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라고 불렀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누가복음 8장 2~3절)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 그룹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였을까. 예루살렘의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할 때 제자들은 현장에 없었다. 사도 요한만이 자리를 지켰고 다들 도망쳤다.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뒤에 달아났다. 그때 막달라 마리아는 골고다 언덕에 있었다. 거기서 예수의 최후를 끝까지 지켜봤다.

그뿐만이 아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죽은 뒤 무덤을 처음 찾아간 세 여성(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중 하나였다. 예수의 부활을 확인하고 사도들에게 알린 것도 그녀였다. 그러니 제자 그룹에서도 막달라 마리아는 주요 인물이 아니었을까.

인류학자인 미국 캘리포니아 샌타바버라 필딩 대학원 장 피에르 이즈부츠 교수는 저서 『예수의 발자취(In the footsteps of Jesus)』에서 분명하게 지적했다. 사도 그룹 안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비중이 작지 않았다고 말이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4복음서를 정경(正經)으로 택할 때 영지주의(靈知主義) 문헌들은 괄호 밖으로 밀려났다.

엘 그레코가 그린 막달라 마리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죄인의 이미지로 있었다.

엘 그레코가 그린 막달라 마리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그녀는 오랫동안 죄인의 이미지로 있었다.

외경이나 위경으로 분류되는 영지주의 문헌에도 마리아가 등장한다. 『빌립의 복음서』에는 12사도가 예수에게 따지는 대목이 나온다. 제자들이 “어째서 우리 모두보다 저 여자를 더 사랑하십니까?”라고 묻자 예수는 “저 여자만큼 너희를 사랑하지 않을 리 있느냐?”라고 답한다.

2세기 초에 작성된 영지주의 문헌 『마리아 복음서』에는 마리아가 예수의 메시지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다. 베드로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알지만 우리는 모르는 당신이 기억하는 구세주의 말을 이야기해달라.”이처럼 영지주의 복음서의 곳곳에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한다.

2006년에는 굉장히 도발적이고 파격적인 소설이 등장했다. 제목은 『다빈치 코드』였다. 비록 소설이지만 설정이 충격적이었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있었다는 가상의 설정이다. 소설은 당시 큰 이슈가 됐다. 출간된 해에 전 세계에서 4300만부 이상 팔렸다.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다빈치 코드』까지 개봉해 더 화제가 됐다.

2006년 5월 영화 '다빈치 코드'가 전국 450개 상영관에서 개봉하자 기독교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중앙포토]

2006년 5월 영화 '다빈치 코드'가 전국 450개 상영관에서 개봉하자 기독교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중앙포토]

나는 그때 『다빈치 코드』에 등장하는 주요 현장들을 찾아갈 기회가 있었다. 프랑스 관광청과 영국 관광청이 ‘다빈치 루트’를 조성해 관광 코스로 개발해놓은 참이었다. 소설의 주요 배경도 대부분 프랑스와 영국이었다.

소설과 현실은 사뭇 달랐다. 그런데도 이 여행은 역사와 신화, 사실과 허구, 신과 인간 사이에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시원(始原)을 물색하는 독특한 경험이었다. 현장에서 직접 만난 ‘다빈치 코드’는 신약성서와는 매우 달랐다. 프랑스 파리의 생 쉴피스 성당 측은 “이교도 사원이 있던 터에 성당을 세웠다”라는 소설 대목 때문에 무척 화가 나 있었다. 생 쉴피스 성당에서 20분쯤 걸으면 루브르 박물관이 나왔다. 입구의 거대한 유리 피라미드의 유리창 수가 소설에는 666개로 나온다. 악마의 숫자다. 실제로는 673개다. 이런 식으로 소설은 과장돼 있었다.

소설 `다빈치코드`에서 피라미드가 악마의 숫자인 666개의 유리 조각으로 만들어졌다고 설정됐던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 실제 유리 조각은 673개다.

소설 `다빈치코드`에서 피라미드가 악마의 숫자인 666개의 유리 조각으로 만들어졌다고 설정됐던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 실제 유리 조각은 673개다.

소설 `다빈치코드`에 등장하는 영국 런던의 템플교회. 교회 바닥에 누워있는 수백년된 기사의 석상은 원래 관뚜껑으로 사용된 것이었다.

소설 `다빈치코드`에 등장하는 영국 런던의 템플교회. 교회 바닥에 누워있는 수백년된 기사의 석상은 원래 관뚜껑으로 사용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소설 속 설정이 모두 허구는 아니었다.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는 대목도 있었다. 당시 가이드를 맡은 프랑스인 소피는 1891년에 있었던 실화를 하나 들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 남부 랑그독루시옹 지방에는 예수 당시 세 명의 마리아가 배를 타고 건너왔다는 이야기가 옛날부터 전해오고 있어요.”

소설에서는 세 명의 마리아를 성모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예수의 딸 마리아로 봤다. 소피는 이렇게 말했다. “실제 랑그독루시옹의 성당 신부가 오래된 서류를 발견했어요. 신부는 그걸 들고 파리의 생 쉴피스 성당을 찾아갔지요. 서류를 전한 신부는 막대한 돈을 받았다고 해요. 그런데 서류의 내용과 소재는 아무도 몰라요. 다만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에 대한 서류라는 이야기만 전해질 뿐이죠. 프랑스에선 현재 이 서류에 대한 책과 논문이 200편 이상 출판돼 있어요.” 서류를 들고 생 쉴피스 성당을 찾아온 신부의 실제 이름은 ‘소니에르’였다.

이 모든 추측과 가상의 설정, 혹시나 하는 물음과 의혹들. 이걸 하나로 뭉치고, 또 뭉쳐서 질문을 던지면 이렇지 않을까.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 아니면 사람의 아들인가.  

실제 사람들은 따진다.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 사람의 아들인가.

나사렛에 있는 요셉 교회에 걸려 있던 그림이다. 어린 예수가 아버지 요셉에게서 목수일을 배우고 있다. 요셉은 목수였다.

나사렛에 있는 요셉 교회에 걸려 있던 그림이다. 어린 예수가 아버지 요셉에게서 목수일을 배우고 있다. 요셉은 목수였다.

여기서 자잘한 물음들이 파생된다. 예수는 젊은 혈기의 남성이 아니었나. 그에게도 여자가 있었을까. 예수는 100퍼센트 인간이자 100퍼센트 신이라고 하지 않나. 인간이라면 이성에 대한 감정이 없을 수가 있을까. 어쩌면 결혼도 하지 않았을까. ‘예수의 아내’는 아예 존재할 수 없는가. 아내가 있었다면 자식도 있었겠지. 아들일까, 딸일까. 그럼 자식은 어떻게 봐야 하냐. 그는 인간일까 아니면 신일까. 그럼 그리스도교 신학은 괜찮은 걸까. 신학 체계가 무너지는 건 아닐까. 아예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는 건 아닐까.

예수의 출생, 예수의 아내, 예수의 자식.

그리스도교에서 불경하게 여기는 말이다. 그만큼 폭발력도 크다. 선정적으로 흐를 위험성도 다분하다. 궁금하다. 왜 우리는 예수의 출생과 아내와 자식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걸까. 그런 말에 왜 혹자는 자꾸 눈길을 두고, 왜 혹자는 불쾌해하는 걸까.

그건 우리가 예수의 ‘겉모습’만 알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 출생에 대한 켈수스의 공격도 그렇고, 『다빈치 코드』의 설정도 그렇고, 파피루스 조각에 등장하는 ‘예수의 아내’도 그렇다. 하나같이 예수의 겉모습을 겨냥한다.

갈릴리 호수 위로 배가 한 척 지나고 있다. 예수는 이 갈릴리 호수 주위에서 삶이 힘겨운 이들을 위해 하늘의 메시지를 전했다.

갈릴리 호수 위로 배가 한 척 지나고 있다. 예수는 이 갈릴리 호수 주위에서 삶이 힘겨운 이들을 위해 하늘의 메시지를 전했다.

나는 묻고 싶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예수의 무엇을 믿는 걸까. 총각 예수일까 아니면 유부남 예수일까. 무자식 예수일까 아니면 유자식 예수일까. 사실 예수의 제자들도 몰랐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12사도는 ‘예수의 속모습’을 몰랐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200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예수의 겉모습만 붙들고 있는 건 아닐까.

빌립보가 예수에게 물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빌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2000년 전의 빌립보는 알고 있었을 터이다. 지금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들을. 예수에게 아내가 있는지, 예수에게 자식이 있는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와 어떤 관계인지 말이다. 빌립보는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는 말했다.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갈릴리 호수 주위의 옛날 모습. 유대교의 회당도 보인다. 예수 당시의 풍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이다.

갈릴리 호수 주위의 옛날 모습. 유대교의 회당도 보인다. 예수 당시의 풍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이다.

묻고 싶다. 예수의 출생, 예수의 아내, 예수의 자식을 안다고 해서 예수를 아는 걸까. 또 이를 모른다고 해서 예수를 모르는 걸까. 만약 그 모두를 안다 하더라도 예수는 똑같은 물음을 던지지 않았을까. 우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빌립보의 물음에 예수는 이어서 답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하느냐?”(요한복음 14장 9절)

예수가 말한 ‘나’는 뭘까. 왜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했을까. 예수가 말한 ‘나’는 겉모습이 아니다. 총각 예수도 아니고, 유부남 예수도 아니다. 육신은 그릇일 뿐이다. ‘예수의 주인공’을 담는 일종의 그릇이다. 예수가 말한 ‘나’는 그런 껍질이 아니다. 그러니 예수를 보려면 그릇만 봐선 안 된다. 예수의 안을 봐야 한다. 그릇의 안을 봐야 한다.

그 안에 무엇이 담겨 있을까. 이 물음에 예수가 직접 답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뵌 것이다.”

갈릴리 호수 주변의 자연은 무척 푸르다. 마치 제주도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갈릴리 호수 주변의 자연은 무척 푸르다. 마치 제주도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니 그릇 안에 아버지가 담겨 있다. 그 아버지의 속성이 신의 속성이다. 예수는 다시 말한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복음 14장 11절) 내 안에 ‘신의 속성’이 있고, ‘신의 속성’ 안에 내가 있다. 그 말을 믿어라. 그 말이 진실이니. 예수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 예수가 총각이든 유부남이든 정말 중요할까. 우리가 거해야 할 곳은 ‘예수의 겉모습’이 아니라 ‘예수의 속모습’이다. ‘예수의 형상’이 아니라 ‘예수의 본질’이다. 예수는 말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장 6절)

그렇다. 예수의 겉모습을 통해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가 없다. 예수의 속모습, 예수의 주인공을 통할 때 비로소 아버지께 갈 수 있다. 거기에 길이 있고,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다. 예수는 그렇게 역설하고, 또 역설했다.

그래도 우리는 따진다. 2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예수에게 아내가 있었을까. 그녀의 이름이 막달라 마리아였을까. 그렇게 묻고, 그렇게 따진다. 그런 우리를 향해 예수는 다시 말한다.

“너는 아직도 나를 모르느냐?”

〈8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하늘에는 달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달을 진리에 비유합니다.
그 진리가 우리의 가슴에 그대로 내려와 앉기를 바랍니다.

세종 때 지은 가사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도 그런 뜻입니다.
하늘의 달이, 하늘의 진리가 천 개의 강에 비친다는 말입니다.
말그대로 하늘의 달이 강물 위에 도장을 꽝! 찍는다는 의미입니다.

해인사의 ‘해인(海印)’도 그런 뜻입니다.
하늘의 달이 바다에 도장을 꽝! 찍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되느냐고요?
맞습니다. 내 안에 달이 뜹니다.
하늘에만 있는 줄 알았던 달이,
내 안에도 뜹니다.

사람이 바로
하나 하나의 강이고,
사람이 바로
하나 하나의 바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에만 이런 표현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간단하게 해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럼 구원을 받을 거다.

그런데 여기에는 더 깊은 뜻이 담겨있다고 봅니다.
저는 ‘거함’이란 단어를 묵상해 봅니다.

내가 너희에게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한다.

저는 여기서 달과 강을 봅니다.
하늘의 달이 강에 도장을 찍었으니,
강도 하늘의 달에 도장을 찍어라.

2000년 전에 살았던 빌립보를 묵상합니다.
그는 모두 알고 있었을 겁니다.
우리가 궁금해하는 의문들에 대해서 말입니다.

예수의 출생은 어땠을까,
예수에게 아내가 있었을까,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여성이었을까,
12사도와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는 어땠을까,
예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어땠을까,
예수에게 형제나 자매가 있었을까.

이 모든 물음들에 대한 아주 정확한 답을
빌립보는 알고 있었을 겁니다.
당시에는 그게 특별한 비밀은 아니었을테니까요.
예수의 다른 제자들도 당연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빌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라고 했을 때,
예수는 “너는 나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빌립보는 많은 걸 아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지금 궁금해하는 모든 물음의 답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는 “너는 나를 모른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라고
지적까지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빌립보는 예수의 겉모습만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떠있는 달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달을 가진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복음 14장9절)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 달이 뭐냐고요.
예수 안에 떠있는 그 달이 뭐냐고요.

그게 바로 아버지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 안의 달은 하느님 나라의 속성입니다.
저는 그걸 신의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줄여서 말하면 ‘신성(神性)’입니다.

갈릴리 호수 주위의 옛날 모습. 예수 당시의 풍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이다.

갈릴리 호수 주위의 옛날 모습. 예수 당시의 풍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이다.

산상수훈에서 설했던 예수의 메시지.
복음서에서 설했던 그 모든 예수의 말씀.

그걸 길어올린 근원의 샘물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 안의 달입니다.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 자신을 향해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예수를 아는가.
안다면,
나는 예수의 무엇을 아는가.

내가 아는 건
예수의 겉모습인가.
아니면
예수의 속모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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