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예수뎐]물을 포도주 바꾼 예수 첫 이적…물을 바꾼건 처음이 아니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1.06.05 05:00

업데이트 2021.06.05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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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늘 물음표다. 예수는 어떻게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을까. 그건 역사적 사실일까 아니면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비유일까.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첫 이적을 행한 마을은 가나이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가나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도로 양옆에 펼쳐진 산촌의 모습이 무척 평화로웠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가나로 가는 길은 아름답다. 도로 양옆에 펼쳐진 산촌의 모습이 무척 평화로웠다.

갈릴리에서 가나까지는 자동차로 불과 20분 거리로 그리 멀지 않다. 자동차를 렌트해 갈릴리 호숫가인 티베리아스에서 77번 도로를 타고 서쪽으로 갔다. 77번 도로는 널찍했다.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다. 갈릴리 호수 주변의 산 위로 올라갔을 때 펼쳐지는 고원 풍경이 장관이었다. 갈릴리 하면 호수만 떠올랐는데 그게 아니었다. 갈릴리 일대는 고원 지대가 펼쳐지는 거대한 산촌이기도 했다.

③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의 첫 이적, 왜? 

20분가량 달리자 가나가 보였다. 먼저 눈에 띄는 건 높다란 모스크(이슬람 사원)의 탑이었다. 도시 진입로에는 가나임을 알리는 허름한 아치가 세워져 있었다. ‘WELCOME TO KANA(가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영어 표기 다음에 이슬람 문자가 있고, 그다음에는 유대인들이 쓰는 히브리 문자로 표기되어 있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가나에는 그리스도교인과 이슬람교인, 그리고 유대교인이 함께 살고 있었다.

자동차를 도로변에 세우고 ‘혼인 잔치 교회’로 향했다. 몇 번이나 헤맨 끝에 골목을 돌아 교회를 찾았다. 예수는 이곳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첫 이적을 보였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곳에서 결혼식이 열렸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왔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참석했다. 마리아도 알고 예수도 아는 인물. 예수의 친척쯤 되는 이의 결혼식이었을까. 성서에는 결혼식 주인공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가나 마을의 입구. '웰컴 투 가나'라는 문구가 영어로 적혀 있다. 마을에는 교회와 이슬람 모스크가 함께 있었다.

가나 마을의 입구. '웰컴 투 가나'라는 문구가 영어로 적혀 있다. 마을에는 교회와 이슬람 모스크가 함께 있었다.

복음서에는 사흘째 되는 날 혼인 잔치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일은 따로 기록돼 있지 않다. 그래도 유대인들은 무슨 요일인지 알고 있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토요일로, 그날이 한 주가 끝나는 날이다. 그리고 일요일부터 새로운 주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사흘째 되는 날은 화요일을 가리킨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화요일에 열렸다. 그래서인지 가나의 유대인들은 지금도 결혼식은 화요일을 선호한다.

교회 앞에서 만난 유대인은 “결혼식 자체가 행운의 날이에요. 게다가 예수님의 이적까지 나타났기 때문에 가나 사람들은 화요일에 치르는 결혼식을 ‘더블 럭(Double Luck, 두 배의 행운)’이라 부르지요. 요즘 젊은이들도 결혼식 날짜를 화요일로 잡는 걸 더 좋아합니다.”라고 설명해주었다. 한국으로 치면 일종의 길일인 셈이다. 이사할 때 손 없는 날을 잡는 것처럼 말이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니 담벼락에 요한복음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On the third day, there was a marriage at Cana in Galilee(사흘째 되는 날, 갈릴래아카나에서 혼인 잔치가 있었는데…….”(요한복음 2장 1절) 잠시 후 교회가 나타났다. 예수는 여기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가나 혼인 잔치 교회로 향하는 골목의 벽에 성경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유대교는 토요일이 안식일이다. 세 번째 날은 일요일-월요일-화요일 해서 화요일을 뜻한다.

가나 혼인 잔치 교회로 향하는 골목의 벽에 성경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유대교는 토요일이 안식일이다. 세 번째 날은 일요일-월요일-화요일 해서 화요일을 뜻한다.

당시 혼인 잔치가 열리고 있는데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유대 사회에서 하객들에게 포도주를 대접하는 건 혼주로서 중요한 일이었다. 남도에서 잔칫상에 홍어가 빠지면 안 되고, 동해안 일대에서 잔칫상에 문어가 빠지면 안 되듯이 말이다.

마리아가 예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예수 앞에는 유대인들이 정결례(식사 전 손을 씻는 일)에 쓰는 물독 여섯 개가 있었다. 예수는 일꾼들에게 “물독에 물을 채워라.”라고 말했다. 일꾼들은 물독마다 물을 가득 채웠다. 예수는 “그것을 퍼서 과방장(혼인 잔치 등 축제를 주관하는 사람)에게 날라다 주어라.”라고 했다. 과방장은 물로 만든 포도주를 맛봤다. 그러고는 신랑을 불러 말했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두셨군요.”(요한복음 2장 6~10절)

예수의 포도주 이적은 논쟁이 되어왔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라. 멀쩡한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게 가능한가? 아무리 하느님(하나님)의 아들이라 해도 그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 아닌가?”
“성서의 이적 일화는 예수 후대에 추가된 이야기다. 예수가 메시아임을 드러내기 위해 가공한 이야기다.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거세게 반박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아들이다. 자연의 흐름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힘을 보여주니 신의 아들이다. 그래서 물이 포도주가 됐다. 그분이 진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징표다.”
“예수님의 이적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당신 안에 믿음이 없다는 이야기다.”

논쟁은 끝이 없다. 양쪽은 평행선을 달린다.

가나 혼인 잔치 교회의 전경. 교회 안에는 2000년 전에 사용했던 유물들도 전시돼 있다.

가나 혼인 잔치 교회의 전경. 교회 안에는 2000년 전에 사용했던 유물들도 전시돼 있다.

가나 혼인 잔치 교회의 뜰에 섰다. 성서 속의 일화는 늘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일화에 담긴 메시지는 뭘까. 그 이야기를 통해 예수는 우리에게 무엇을 건네려 한 걸까.

예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하늘나라 사람’에 대한 그림이 있었다. ‘천국의 사람들은 이러이러할 것이다’라는 나름의 추측이었다. 유대교 신앙과 전통 속에서 유대인들은 그런 추측을 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계속해서 이적을 보여달라거나 기적을 행해보라고 요구하는 데에도 이러한 종교적 배경이 깔려 있다. 그들은 이적을 통해 ‘천국 사람’을 확인하고자 했다. 구약에는 신의 이름을 통해 이루어지는 숱한 이적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 당시에도 유대인은 구약을 믿는 민족이었다.

사실 물을 다른 것으로 바꾼 사람은 예수가 처음이 아니었다. 구약의 모세가 먼저 보여주었다. 모세는 양을 치다가 호렙 산에 올라갔고 거기서 불붙은 떨기나무와 함께 신의 음성을 들었다.

“이제 나는 내 백성을 구해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 가나안으로 인도할 것이다. 너는 파라오에게 가서 내 백성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와라.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스스로 있는 분이 나를 보내셨다’고 말해라.”

당시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고 있었다. 모세는 걱정이 됐다. ‘가서 이 말을 전한다 한들 그들이 믿을까.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걸 사람들이 순순히 믿을까.’

모세의 걱정을 읽은 하느님이 세 가지 대책을 내놓았다. 그중 하나가 나일 강의 강물이었다.

모세와 아론이 이집트 나일강의 강물을 붉은 피로 만들고 있다.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들기 전에, 구약의 모세와 아론이 강물을 붉은 피로 바꾸었다.

모세와 아론이 이집트 나일강의 강물을 붉은 피로 만들고 있다.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들기 전에, 구약의 모세와 아론이 강물을 붉은 피로 바꾸었다.

“사람들이 네 말을 믿지 않으면 나일 강에 가서 강물을 떠라. 그리고 땅에 부어라. 그럼 그 물이 피로 바뀔 것이다.”

이집트로 돌아간 모세는 자신이 겪은 일을 말했다.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다. 모세가 나일 강의 물을 퍼서 땅에 붓자 피로 변했고, 그 광경을 보고서야 유대인들은 모세의 말을 믿었다. 이집트의 왕 파라오도 모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결국 이집트의 모든 강과 운하, 나무 그릇이나 돌 항아리에 있는 물까지도 피로 변했다. 구약에는 그렇게 기록돼 있다.

모세는 강물을 피로 바꾸었고,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모세의 이적을 하느님의 징표로 여겼다. 그들은 이적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럼 예수 당시에는 어땠을까. 갈릴리의 호수에서, 산 위에서,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메시지를 듣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하느님의 징표’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있었다. 그들에게 구약은 절대 척도였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도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요구하고, 유대인들은 징표를 요구한다고 했을까.

혼인 잔치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교회 내부는 넓지는 않았다. 정면 벽에 그림이 하나 걸려 있었다.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모습이었다. 예수 앞에는 물 항아리 여섯 개가 나란히 놓여 있고 일꾼들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항아리에 붓고 있었다. 예수는 고개를 숙인 채 항아리 위로 손을 든다. 마치 “물아! 포도주로 바뀌어라.” 하고 명령하듯이 말이다. 그런 예수 곁에서 마리아가 지긋이 쳐다보고 있다. 항아리 옆에 놓인 컵에는 붉은 포도주가 반쯤 담겨 있다. 항아리의 물이 무엇으로 변할지 암시하고 있다.

예수는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항아리에 물을 채워 포도주로 바꾸었다고 한다.

예수는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항아리에 물을 채워 포도주로 바꾸었다고 한다.

교회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갔더니 오래된 유물들이 있었다. 예수 당대에 썼던 돌 항아리도 전시돼 있었다. 큼지막한 돌에 커다란 구멍을 파서 항아리로 쓰는 식이었다. 그 밖에도 1세기경의 유물들이 여럿 보관돼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며 생각했다. 예수는 왜 이 땅에 왔을까. 이유는 하나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궁금했다. 예수가 물 항아리 여섯 개가 아니라 육백 개, 육천 개에 담긴 물을 포도주로 바꾼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일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예수가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걸 확신하게 될까. 아니면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도 바꾸었는데, 우리의 인생인들 더 좋게 바꾸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복적 심리가 깔려 있는 걸까. 왜 우리는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의 이적에 매달리고 싶은 걸까.

교회 안에는 사도 요한의 동상이 있었다. 가나 혼인 잔치 일화가 신약성서 중 유일하게 요한복음에만 등장하기 때문인 듯싶었다. 그 앞에서 눈을 감았다. 예수의 첫 이적, 그에 담긴 메시지는 과연 뭘까. 나와 예수 사이의 간격. 그걸 잇는 징검다리는 뭘까.

가나 혼인 잔치 교회 안에 서 있는 사도 요한의 동상. 동상 아래에는 '에반겔리스트'라고 적혀 있다.

가나 혼인 잔치 교회 안에 서 있는 사도 요한의 동상. 동상 아래에는 '에반겔리스트'라고 적혀 있다.

이적의 첫 단추는 ‘물’이다. 나일 강의 강물도 물이고, 가나 혼인 잔치에서 항아리를 채운 것도 물이었다. 아무런 색깔도 없고, 냄새도 없고, 맛도 없는 그냥 물이었다. 그 물이 피로 변하고 포도주로 변했다. 무색, 무미, 무취의 물이 어떻게 붉디붉은 액체로 변했을까. 요한의 동상 아래에는 ‘에반겔리스트(EVANGELIST)’라고 새겨져 있었다. ‘복음서 저자’라는 뜻이다. 나는 요한복음의 첫 장을 펼쳤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복음 1장 3절)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복음 1장 14절)

붉은 피도, 붉은 포도주도 ‘물’을 통해 생겨났다. 그럼 물은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요한복음도 말한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피와 포도주도 마찬가지다. ‘그분’을 통해 생겨났다. 그분을 통해 무색(無色)이 유색(有色)으로 바뀌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바뀐다. 아무런 맛이 없던 것이 맛을 가진 것으로, 냄새가 없던 것이 냄새가 있는 것으로 변한다.

예수 역시 그렇게 이 땅에 왔다. 물이 포도주가 되듯이. ‘없이 계신 하느님’이 눈에 보이는 몸을 입고 왔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일이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네 글자로 표현한다.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空)’은 만물의 바탕이다. 공간적 개념이 아니다. 시공간을 초월한 우주의 근원을 뜻한다. 그게 눈에 보이는 ‘옷’을 입으면 ‘색(色)’이 된다. 그래서 ‘공’이 ‘색’이 된다. 그게 ‘공즉시색’이다.

가나 혼인 잔치 교회의 내부. 벽에는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가나 혼인 잔치 교회의 내부. 벽에는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러면 물음이 올라온다.  우리에게 나일 강의 강물은 무엇일까. 붉은 피는 또 무엇일까. 우리도 물을 포도주로 바꿀 수 있을까. 그건 예수에게만 가능한 일일까. 그렇다면 요한은 왜 굳이 이 일화를 성서에 넣은 걸까. 단지 예수의 이적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을까.

교회 뜰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다. 혼인 잔치 때 그 우물에서 물을 길어 돌 항아리에 부었다고 한다. 나는 우물 앞에 서서 눈을 감았다. 내 안의 우물, 우리 안의 우물은 어디일까. 두레박을 떨어뜨리면 첨벙하고 떨어지는, 그곳은 어디일까.

신은 인간을 지을 때 신의 속성을 불어넣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나일 강이 흐르고 있다. 무색, 무미, 무취의 물이 흐른다. 그게 신의 속성이며 그게 내 안의 우물이다. 우리는 날마다 그 우물에 두레박을 떨어뜨린다. 그리고 물을 길어 올린다. 우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물은 바뀐다. 때로는 피가 되고, 때로는 포도주가 되고, 때로는 숭늉이 되고, 때로는 커피가 된다. 그게 뭘까. 우리가 날마다 쓰는 ‘마음’이다. 때로는 기쁜 마음, 때로는 슬픈 마음, 때로는 화나는 마음, 때로는 아픈 마음이 된다. 그 모든 마음이 ‘내 안의 우물’이 없다면 생겨날 수가 없다.

갈릴리에서 가나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조그만 규모인 가나 시내의 모습이다.

갈릴리에서 가나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조그만 규모인 가나 시내의 모습이다.

요한복음은 말한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나일 강의 강물이 없다면 붉은 피도 없다. 우물물이 없다면 포도주도 없다. 물이 있기에 커피도 있고, 숭늉도 있고, 주스도 있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내 안의 우물(신의 속성)’이 있기에 우리가 마음을 길어 올린다. 희로애락의 온갖 마음이 거기서 창조된다.

그럼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만 신비일까. 내 안에서 길어 올린 두레박의 물이 온갖 마음으로 바뀌는 것도 신비다. 예수가 보여준 첫 이적은 우물에서 길어 올린 마음을 어떻게 쓸지를 보여준다. 가나에서는 혼인 잔치 도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하객들은 아쉬워하고 혼주는 난감한 상황이었으리라. 그때 예수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했던 것, 그것을 만들었다. 나는 거기서 ‘예수의 마음 사용 설명서’를 읽는다.

“네 안에 신의 속성이 있다.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처럼 너는 온갖 마음을 창조할 수 있다. 마치 물을 포도주로 바꾸듯이 말이다. 필요한 때, 필요한 장소에서, 필요한 이에게, 필요한 마음을 창조해서 써라.” 이게 예수가 전하는 ‘마음 사용 설명서’의 골자다.

구약성서 창세기에는 천지를 창조한 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기 1장 25절)라고 기록돼 있다. 우리는 어떨까. 마음을 창조해서 쓴 뒤에 “보기에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마음을 쓰고 있을까. 행여 포도주가 필요한 곳에서 커피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올리브유가 필요한 이에게 주스를 건네고 있는 건 아닐까. 마음의 우물에서 그렇게 엉뚱하게 두레박질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가나 혼인 잔치 교회 위에 새겨진 동상. 예수가 첫 이적을 보여다는 장소에 교회가 지어졌다.

가나 혼인 잔치 교회 위에 새겨진 동상. 예수가 첫 이적을 보여다는 장소에 교회가 지어졌다.

요한복음에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첫 이적을 본 뒤 제자들이 비로소 예수를 믿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니 제자들도 예수 안에 무엇이 흐르는지 ‘예수의 주인공’을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이적을 보고서야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전에는 긴가민가하지 않았을까. 그럼 그들은 ‘이적을 행하는 예수’를 믿은 걸까, 아니면 ‘신의 속성을 품은 예수’를 믿은 걸까.

당시 사도들만 이 물음을 겨누었던 게 아니다. 2000년을 뛰어넘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화살로 날아와 꽂힌다. 내가 믿고 싶은 예수는 이적을 행하는 예수인가 아니면 신의 속성을 품은 예수인가. 우리는 어느 통로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걸까. 이적을 통해서일까 아니면 신의 속성을 통해서일까.

〈4회에서 계속 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글·사진=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짧은 생각
 예수님의 첫 이적은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일’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말입니다. 성서에는 그것을 본 제자들이 ‘비로소 믿기 시작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의 첫 이적’을 보기 전에는 제자들도 확신이 없었던 겁니다. 어쩌면 반반이었겠지요. 이 사람이 정말 하늘 사람인가, 아닌가. 반신반의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자 ‘비로소 믿기 시작’한 겁니다. 그만큼 당대의 유대인들은 ‘이적’을 중시했습니다. ‘이적=하늘의 징표’로 봤으니까요.

가나의 혼인 잔치 교회에는 2000년 전 예수 당시에 썼던 유물이 군데군데 전시돼 있다. 2000년 전에 포도주 등을 담았던 항아리다. 백성호 기자

가나의 혼인 잔치 교회에는 2000년 전 예수 당시에 썼던 유물이 군데군데 전시돼 있다. 2000년 전에 포도주 등을 담았던 항아리다. 백성호 기자

정작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의 첫 이적을 본 제자들은 어땠을까요.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그리고 물을 포도주로 바꾼 그 장면을, 그 시간을, 그 공간을 평생 잊지 못했을 겁니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을까요.

여기서 물음표가 하나 있습니다. 4 복음서는 마가, 마태, 누가, 요한복음입니다. 그중에서 요한복음이 가장 후대에 기록됐습니다. 앞의 세 복음서와 수십 년 차이를 두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첫 이적 일화는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돼 있습니다. 마가, 마태, 누가복음에는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이적 일화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이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자들이 그걸 망각할 수는 없으니까요. 자신의 눈앞에서 예수님이 직접 보여주신 첫 이적을, 그 충격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복음서를 기록하며 그걸 누락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혹자는 의혹을 제기합니다. 어떤 의혹이냐고요?

물을 포도주로 바꾼 예수님의 첫 이적 일화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만 기록됐다는 겁니다. 이런 지적을 불쾌하게 여기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성서의 기록은 한 획 한 점도 오류가 없다는 분도 많습니다. 성서가 기록되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실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도 다 알지 못한다는 분도 있습니다. 다만 성서는 진리를 기록한 책이니 믿어야 한다는 반박도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포도주를 담아서 따랐던 병이 이렇게 생겼다. 손잡이가 세 개인 점이 특이하다. 오른손으로 잡고 물을 부으며 왼손을 씻은 다음, 오른손을 씻기 위해 왼손으로 잡을 깨끗한 손잡이가 필요했다. 그래서 손잡이가 세 개다. 그만큼 유대인은 정결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백성호 기자

예수님 당시에 포도주를 담아서 따랐던 병이 이렇게 생겼다. 손잡이가 세 개인 점이 특이하다. 오른손으로 잡고 물을 부으며 왼손을 씻은 다음, 오른손을 씻기 위해 왼손으로 잡을 깨끗한 손잡이가 필요했다. 그래서 손잡이가 세 개다. 그만큼 유대인은 정결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백성호 기자

그런 논쟁을 생각하며 저는 가나의 혼인 잔치 교회 뜰에 섰습니다. 새 소리도 들리고, 바람도 불었습니다.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을 울리는 건 그런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첫 이적이 역사적 사실인가, 아니면 후대의 가공이나 전승인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제 마음을 울리는 건 이적 일화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거기에 담겨 있는 본질적 메시지였습니다. 왜냐고요? 저를 실질적으로 평화롭게 하고, 저를 자유롭게 하는 건 성서에 담긴 이적보다 거기에 담긴 메시지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세상 그 어떤 이적보다 더 큰 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그 한 마디로 인해 우리 앞에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 길의 끝에 하늘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에 그보다 더 큰 이적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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