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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예수, 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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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의 예수뎐]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주기도문 교회로 갔다. 그곳에 매우 특별한 공간이 있었다. 2000년 전 예수가 몸소 기도한 장소다. 거기는 번듯한 건물이 아니었다. 지하 동굴처럼 생긴 공간이었다.

올리브산에서 내려다 본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구시가지다. 올리브산에는 예수가 기도했다는 주님의기도(주기도문) 교회가 있다.

올리브산에서 내려다 본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구시가지다. 올리브산에는 예수가 기도했다는 주님의기도(주기도문) 교회가 있다.

반지하 동굴로 들어가는 작은 입구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도 바닥도 벽도 모두 돌이었다. 그런 바위굴이었다. 태양이 작열하는 이스라엘 땅에서 그런 동굴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서늘해진다. 온도가 뚝 떨어진다. 에어컨이 필요 없다. 예수 당시에도 사람들은 햇빛과 더위를 피하려고 이런 공간에 머물렀다.

⑤예수, 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나.   

바위굴 안쪽에 눈에 띄는 공간이 있었다. 철문으로 막아 출입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 철문 너머 공간이 바로 예수가 기도한 장소라고 한다. 철문 앞까지, 가까이 가서 봤다. 아주 작은 방만한 크기였다. 예수는 거기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주기도문)’를 가르쳤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태복음 6장 9~10절)

주님의기도(주기도문) 교회 안에는 예수가 직접 기도를 했다는 장소가 있다. 철문으로 닫혀진 공간(위 사진) 너머의 더 깊은 공간(아래 사진)이 바로 그곳이다.

주님의기도(주기도문) 교회 안에는 예수가 직접 기도를 했다는 장소가 있다. 철문으로 닫혀진 공간(위 사진) 너머의 더 깊은 공간(아래 사진)이 바로 그곳이다.

예수는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를 썼다. 당시 아람어는 유대인의 공용어였다. ‘주님의 기도’에서 예수는 아버지를 부를 때 아람어로 “압바(Abba)”라고 불렀다. 유대의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우리말 “아빠”와 매우 유사하다. 예수는 기도할 때 하느님(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다.

우리는 어떨까. 하느님을 “아빠”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부른다. 한국어 주기도문에도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라고 돼 있다. “거룩하신 하느님을 어떻게 ‘아빠’라고 부를 수 있나. 그 호칭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 부를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입양된 양자이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없고, 그렇게 불러서도 안 된다.” 이렇게 주장하는 목회자도 있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예수가 기도드린 바위굴에서 눈을 감았다. 예수는 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을까.

답은 어렵지 않다. 친근하기 때문이다. 친근한 게 뭔가. 가까운 거다. 예수와 하느님은 왜 가까웠을까.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나를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예수의 내면과 신의 내면이 통한다. 둘은 그렇게 ‘신의 속성’으로 통한다. 하느님이 아담을 지을 때 불어넣었다는 ‘신의 속성’ 말이다. 그렇게 예수 안에는 ‘하느님’이 있었다. 그러니 가까울 수밖에 없고 친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절로 이렇게 부르게 된다.

“아빠!”

예수는 자신이 직접 하늘에 올리던 기도를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가르쳐 주었다. 그게 주님의 기도다.

예수는 자신이 직접 하늘에 올리던 기도를 제자들에게도 똑같이 가르쳐 주었다. 그게 주님의 기도다.

그럼 우리는 어떨까. 다르다. 여전히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건 거리감 때문이지 싶다. 나와 아버지 사이에는 늘 ‘거리’가 있다. 그래서 “아빠”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엄격하고 거룩한 분이며 우리가 기도를 올려야 하는 대상이다. 내가 감히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처럼 거룩한 하느님을 향해 예수는 “압바”라고 불렀다. 어찌 보면 굉장한 파격이다. 실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첫째로 안식일을 어겼고, 둘째로 하느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불러서였다. 그리함으로써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5장 18절)

그런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칠 때 자신의 기도문을 그대로 전했다. 아람어로 “압바”라 부른 ‘주님의 기도’를 그대로 일러주었다. 만약 ‘압바’라는 호칭이 예수에게만 허락된 것이라면 제자들에게는 달리 가르쳤을 터이다.

예수의 눈에 하느님은 자신에게도 ‘압바’이고 제자들에게도 ‘압바’였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에게 ‘압바’이다. 인간을 지을 때 하느님이 ‘신의 속성’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다. ‘없이 계신 하느님의 DNA’가 우리 안에도 흐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압바’이다.

올리브산에 있는 주님의기도(주기도문) 교회의 전경이다. 아름드리 야자수가 이국적이다.

올리브산에 있는 주님의기도(주기도문) 교회의 전경이다. 아름드리 야자수가 이국적이다.

예수는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압바)의 이름이 드러나고, 아버지(압바)의 나라가 오고, 아버지(압바)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그러기 위해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도하라고 했다. 골방이 어디인가. 자신의 내면이다. 왜 자신의 내면인가. 그곳으로 아버지의 이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늘이 어디일까. 하느님 나라다. 땅은 어디일까. 나의 나라, 나의 내면이다. 하늘이 땅이 되는 일. 예수는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왔다.

산상수훈에서도 예수는 말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복음 5장 3절)

가난한 마음이 뭔가. 집착이 없는 마음이다. 뿌듯함이 없는 마음, 틀어쥔 게 없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일 때 하느님 나라가 온다. 그 마음의 속성과 하느님 나라의 속성이 통하기 때문이다. 물은 물과 하나가 된다. 기름과 물은 하나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하늘나라의 속성과 나의 속성이 통해야 한다. 그래야 땅이 하늘이 된다. 예수의 기도처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주님의기도 교회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주님의기도가 새겨져 있다. 순례객들이 이를 둘러보고 있다.

주님의기도 교회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주님의기도가 새겨져 있다. 순례객들이 이를 둘러보고 있다.

예수의 기도는 계속된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마태복음 6장 11절)

여기서 ‘예수의 눈’이 드러난다. 우리는 하루 세 끼를 먹는다. 예수는 그 세끼의 출처를 ‘하느님’이라 말한다. 왜 그랬을까.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남’을 알기 때문이다. 그걸 알면 달라진다. 일상 속의 소소한 일들을 통해서도 아버지의 뜻을 읽게 된다. 그 뜻에 나를 맡기면 내 마음은 더 가난해진다. 가난해진 만큼 하늘이 땅으로 더 내려오는 법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마태복음 6장 12~13절)

예수는 하늘이 땅이 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했다. 그 첫 단추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는 일이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하느님의 용서’가 움직인다. 여기에는 용서의 이치가 담겨 있다. 용서란 내 마음에 남아 있는 앙금을 털어내는 일이다. 일종의 포맷이다. 앙금을 다 털어낼 때 우리는 텅 빈 마음이 된다. 하느님 나라에는 앙금이 없다. 그러니 내게 앙금이 없어야 하느님 나라가 오지 않겠나. 내게 앙금이 남아 있으면 하느님 나라가 올 수 있겠나. 왜 그럴까. 내가 스스로 통로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직접 기도를 했다는 동굴에 세워져 있는 예수의 초상화. 바깥이 아무리 더워도 이곳에만 들어서면 순식간에 시원해졌다.

예수가 직접 기도를 했다는 동굴에 세워져 있는 예수의 초상화. 바깥이 아무리 더워도 이곳에만 들어서면 순식간에 시원해졌다.

‘주님의 기도’를 일러주고서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복음 6장 14~15절)

주기도문 교회를 거닐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된 ‘주님의 기도’도 있었다. 산스크리트어는 불교의 언어다. 아랍어로 된 ‘주님의 기도’도 있었다. 이슬람의 언어다. 히브리어로 된 ‘주님의 기도’도 있었다. 유대교의 언어다. 언어가 다르고 언어에 깔린 종교적 배경이 달라도 메시지는 통했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길. 이는 모든 종교의 염원이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으로 가보았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일러준 곳이었다. 바위굴 안에 스무 명쯤 되는 외국인들이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온 순례객들이었다. 그들의 노래가 바위굴 안에서 울렸다. 예수는 알았을까. 강산이 200번이나 바뀐 뒤에도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기도가 이곳에서 울려 퍼지리라는 것을 말이다.

주님의기도(주기도문) 교회에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언어로 된 주기도문이 벽에 붙어 있다.

주님의기도(주기도문) 교회에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언어로 된 주기도문이 벽에 붙어 있다.

순례객들은 눈을 감고 있었다. 예수가 기도한 곳에서 부르는 예수의 기도. 그 기도가 바위에 부딪혔다. 천장에도 울리고, 바닥에도 울리고, 순례객들의 심장에도 울렸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그렇게 ‘용서의 메아리’는 울리고, 또 울렸다.

〈6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글·사진=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짧은 생각


주기도문에는 ‘용서’의 코드가 담겨 있습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는 몇 번이나 이 구절을 읊조려봅니다.

왜냐고요?
여기에는 용서의 작동 원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우리에게
뭔가 걱정거리가 생기고,
아픔이나 슬픔의 고통거리가 생길 때
우리의 마음에는 파도가 칩니다.

그 파도가 포맷될 때,
비로소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똑같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을 때,
이미 우리 마음속에는 파도가 칩니다.

미움의 골이 깊고,
증오의 골이 깊을수록
파도는 더 거세게 넘실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의 용서를 구하기 전에
내 마음의 파도를 먼저 포맷시키라고 말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라고 기도하며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내 마음이 포맷된 곳으로,
포맷된 하늘의 마음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남을 용서한 나의 마음으로,
나를 용서하는 하늘의 마음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거기서
마음에 담긴 용서의 작동 원리를 읽습니다.

그걸 설한 예수님의 마음을 읽습니다.

백성호의 예수뎐, 지난 기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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