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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지만 2개 아닌 산상수훈, 예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었다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2021.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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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사람들은 따진다. “예수는 좌파인가, 아니면 우파인가” 좌파 진영에서는 예수를 ‘인간 해방의 전사’로 보고, 우파 진영에서는 예수를 ‘개인 구원을 위한 구세주’로만 본다. 그런데 예수가 살았던 2000년 전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다. 당시 이스라엘에도 좌파와 우파가 있었다. 그 속에서 예수는 어디쯤 서 있었을까.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의 무덤에서 한 정통파 유대인이 기도를 하고 있다. 성경에는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기록돼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의 무덤에서 한 정통파 유대인이 기도를 하고 있다. 성경에는 예수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기록돼 있다.

⑧예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었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총독의 지배를 받았다. 로마 제국에 세금을 내야 했고, 로마의 황제가 새겨진 동전을 써야 했다. 로마의 동전은 유대 민족에게 우상 숭배였다. 사람의 얼굴을 동전에 새기는 것 자체가 유대 율법에서는 금기였다. 하느님이 주신 ‘우상 숭배 금지’의 십계명을 어기는 일이었다. 유대인은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만큼 로마에 대한 반감이 거셌다.

당시 로마 제국은 다신교를 믿는 나라였다. 태양을 숭배하고 동물을 숭배하던 민족이었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란 이가 세웠다는 나라가 로마다. 로마에는 곳곳에 늑대 젖을 먹는 쌍둥이 형제 레무스와 로물루스의 조각상이 있었다. 그러니 유일신을 믿는 민족이 다신교를 믿는 제국의 지배를 받는 셈이었다. 유대 민족은 극도의 모멸감을 느껴야 했다.

유대 역사 속에도 비슷한 시기가 있었다. 구약의 모세 시대,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다. 이집트인들은 태양신을 믿었다. 유대인의 눈에 태양신은 우상에 불과했다. 그러니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은 선조들의 이집트 시절을 떠올렸을 터이다. 자신들의 처지가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야 했던 암흑의 시대와 비슷하다고 여겼을 터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독립을 꿈꾸었다.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했듯이 로마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했다.

로마 제국의 공격을 받고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는 모습이다. 당시 성안에서는 살육이 자행됐다.

로마 제국의 공격을 받고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되는 모습이다. 당시 성안에서는 살육이 자행됐다.

로마 제국에 맞서 유대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유대 전쟁을 그린 작품이다. 로마군은 결국 예루살렘을 함락했고,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을 모두 불태웠다. 이 전쟁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이스랴엘을 떠나 터키와 로마 일대로 가서 디아스포라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로마 제국에 맞서 유대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유대 전쟁을 그린 작품이다. 로마군은 결국 예루살렘을 함락했고,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예루살렘 성전을 모두 불태웠다. 이 전쟁으로 인해 유대인들이 이스랴엘을 떠나 터키와 로마 일대로 가서 디아스포라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에는 유대의 독립을 꿈꾸는 세력이 있었다. 로마 제국에 맞서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이들이었다. 바로 ‘열심당(熱心黨)’이다. 예수가 활동하던 주 무대였던 갈릴리(갈릴레아) 일대가 열심당의 근거지였다. 그 지역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반골 기질’이 강했다.

예수 주위에도, 예수의 설교를 듣는 이들 중에도 열심당원들이 꽤 있었다. 실제 예수의 제자 중 시몬도열심당원이었다. 예수를 배신한 가롯 유다 역시 열심당원으로 보인다. 그들은 수시로 예수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왜 유대 민족을 식민지 처지에서 해방시키지 않느냐고. 어째서 이대로 두고 보기만 하느냐고. 그렇게 따지지 않았을까.

그런 유대인들에게 무력 투쟁은 일종의 시대적 요청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 중에서 유대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강한 종교적 믿음을 품고 있었다.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다. 아이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을 때도 요셉 주위의 사람들은 “당신의 조상 중에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지 않은가?”라고 되물었다. 만약 이름을 ‘다윗(영어로 데이비드)’이라고 지었다면 아무도 그렇게 묻지 않았을 터이다.

다윗이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이었다. 다윗의 후손들은 주로 베들레헴 지역에 모여 살고 있었다. 예수의 출산을 위해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을 찾은 것도 다윗의 후손인 요셉이 베들레헴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팔복교회에서 바라본 갈릴리 호수의 모습이다. 저 푸른 언덕 어디쯤에서 예수는 산상수훈을 설했을 터이다.

팔복교회에서 바라본 갈릴리 호수의 모습이다. 저 푸른 언덕 어디쯤에서 예수는 산상수훈을 설했을 터이다.

마태복음의 첫 구절은 이를 강하게 의식한다.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았으며…….”(마태복음 1장 1절) 마태는 예수가 다윗의 자손임을 복음서의 첫 장, 첫 구절에서부터 못 박았다. 당시 유대인의 상식을 겨냥해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자 메시아’임을 강조한 셈이다.

그러니 예수 당시에는 어땠을까. 유대인들은 신의 아들이라는 그가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주길 기대했을 터이다. 예수가 그런 지도자이자 선봉장, 그런 혁명가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다. 어떤 이는 예수를 ‘인간 해방을 위한 혁명가’로 보고, 또 어떤 이는 예수를 ‘인간 영혼에 대한 구원자’로 본다. 어느 쪽 눈에 무게를 싣느냐에 따라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좌파와 우파로 나뉜다.

나는 갈릴리 호숫가의 언덕을 올랐다. 도로를 따라 조금만 올라가니 ‘팔복교회(The Church of the Beatitudes)’가 나왔다. 예수가 ‘산상수훈’을 설했다고 전하는 곳에 세운 교회다. 나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다.

 “아! 이곳이었구나. 이렇게 생긴 언덕, 이렇게 생긴 나무들, 이렇게 생긴 풀들을 배경으로 산상수훈을 설했구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란 예수의 노래가 이렇게 생긴 언덕에서 울려 퍼졌구나!”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설한 팔복을 기리며 세운 팔복교회. 세계 각국에서 순례객들이 찾아와 기도를 하고 있었다.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설한 팔복을 기리며 세운 팔복교회. 세계 각국에서 순례객들이 찾아와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곳에 서서 나는 눈을 감았다. 정작 예수 자신은 어땠을까. 그가 이곳에서 산상수훈을 설할 때 후대에 이런 논란이 일어나리라 예상했을까. ‘예수의 눈’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쪼개지리라고 생각했을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산상수훈이 등장한다. 두 산상수훈은 달리 해석된다. 마태복음에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적혀있고, 누가복음에는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기록돼 있다. 하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부르고, 나머지 하나는 그냥 “가난한 사람들”을 부른다. 누가복음에는 또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어서 누가복음은 “행복하여라” 대신 “불행하여라”로 시작하며 ‘불행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어떤 사람이 불행한 이들일까. 누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는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불행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부유하고, 배부르고, 웃고 있을 때 통상 결핍을 느끼지 못한다. 목마름이 없다. 그래서 눈을 자기 내면으로 돌리지 않는다. 눈을 안으로 돌리지 않는 사람은 회개할 수가 없다. 에고가 무너질 수가 없다. 그러니 ‘마음의 가난’을 체험할 수도 없다.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니 마음의 가난을 모르면 하늘나라도 모른다. 예수는 그 점을 지적했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산상수훈의 공간적 배경도 이와 비슷하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산상수훈의 공간적 배경도 이와 비슷하다.

예수는 마태복음을 산에서, 누가복음을 평지에서 설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산상설교, 누가복음은 평지설교라 불린다. 이에 대한 해석을 놓고 그리스도교 내부는 다시 좌파와 우파로 갈린다.

좌파 진영은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강조했다. 그건 물질적 가난을 의미한다. 사회적 빈자와 약자를 위한 말씀이다. 예수님은 ‘인간 해방’을 위해 싸운 분이며, 그들을 위해 싸우는 게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해방신학자들도 그렇게 본다.

우파인 복음주의 진영은 다르다. “예수님은 ‘영적인 가난’을 말했다. 사회적 문제와 큰 상관이 없다. 오직 영적인 가난을 추구하는 게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라고 풀이한다. 좌파는 ‘사회 구원’에, 우파는 ‘개인 구원’에 방점을 찍는다. 둘은 그렇게 갈라선다.

그럼 예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두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메시지는 정말 이토록 다른 것일까. 진보 진영에서 사회운동을 하며 평생을 바치고 있는 목사님에게 터놓고 물어본 적이 있다.

“일을 하다 보면 지치지 않으십니까? 계속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다 보면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나요?”

나는 그분이 반박하고 부인하리라 예상했다. 뜻밖에도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솔직히 그렇습니다. 일을 할 때에는 열심히 하지만 돌아서면 지칩니다. 갈수록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지요. 그건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 그건 내면의 샘터를 놓쳤기 때문이다. 사회적 모순을 지적하느라 눈이 바깥을 쫓아가는 사이에 영성의 샘터에서 펌프질하는 것을 잊어버린 탓이다.

갈릴리 호수 주변의 풍광은 무척 아름답다. 마치 제주도에 가서 푸르른 풍광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갈릴리 호수 주변의 풍광은 무척 아름답다. 마치 제주도에 가서 푸르른 풍광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그러면 우파인 복음주의 진영은 어떨까. 그들은 주로 영적인 문제를 강조한다. 사회적 발언에는 무관심하다. 그런데 궁금해진다. 그렇게 영적으로 가난하고 또 가난해진 다음에는 어쩔 건가. 그렇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다음에는 어쩔 건가. 그렇게 안으로 들숨만 들이마신 다음에는 어쩔 건가. 거기서 멈추면 죽고 말 것이다. 그 ‘무한한 고요’ 속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살려면 다시 숨을 내쉬어야 한다. “파아!” 하고 날숨을 내뱉어야 한다. 그래야 살 수가 있다.

예수의 영성도 마찬가지다. 안으로 들이마신 다음에는 바깥으로 내쉬어야 한다. 일상을 향해, 현실을 향해, 사회를 향해 내쉬어야 한다. 가난한 마음을 찾고, 그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 다시 가난한 마음을 찾고, 그 마음으로 또 하루를 사는 거다.

가난한 마음을 찾는 게 ‘들숨’이고, 그 마음으로 하루를 사는 게 ‘날숨’이다. 그게 그리스도교의 영성이자 사회적 실천이다. 우리는 그런 행위를 ‘수도(修道)’라고 부른다. 그 와중에 나의 눈이, 에고의 눈이 점점 ‘예수의 눈’을 닮아간다.

그러니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메시지는 둘로 갈라진 게 아니다. 둘로 해석하는 건 쪼개고 나누고 편 가르는 데 익숙한 ‘나의 눈’ 때문이다. 인간의 눈, 에고의 눈 말이다. ‘예수의 눈’에서는 그렇게 쪼개질 수가 없다. 들숨과 날숨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숨이 아니다. 그저 하나의 숨이다. 개인의 영성과 사회적 실천도 마찬가지다. 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진보와 보수를 고집하는 이들은 스스로 ‘반쪽’임을 자처한다. 예수는 ‘반쪽’이 아니라 온전한 ‘하나’였다.

팔복교회에서 아래로 내려가다보면 만나는 들판의 풍경. 예수는 이 지역을 돌아다니며 유대 회당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팔복교회에서 아래로 내려가다보면 만나는 들판의 풍경. 예수는 이 지역을 돌아다니며 유대 회당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요한계시록 22장 13절)

예수는 시작이자 끝이라고 했다. 무슨 뜻일까. 출발점도 아니고 종점도 아니다. 출발점이자 종점이다. 그건 전체를 의미한다. 부분이 아니다. 좌와 우, 둘을 다 품는 전체다. 그게 예수의 정체성이다. 거기서 나는 ‘큰 예수’를 본다. 좌파의 예수 혹은 우파의 예수. 그렇게 작은 예수 말고 큰 예수, 다시 말해 무한의 예수를 본다. 좌파와 우파의 이데올로기 앵글에 갇히지 않는 원래의 예수 말이다. 거기야말로 우리가 거해야 할 곳이 아닐까.

팔복교회 안에 비치된 그레고리안 성가의 악보다. 옛날 악보라 음표의 머리만 있고 꼬리는 없다.

팔복교회 안에 비치된 그레고리안 성가의 악보다. 옛날 악보라 음표의 머리만 있고 꼬리는 없다.

나는 팔복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선율이 아름답고 담백했다.

〈9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대학 다닐 때 기독교 동아리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동아리는 해방신학에 바탕을 두고 학생운동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소외된 이들을 위해 싸웠던 인간 해방의 혁명가로 보더군요. 또다른 기독교 동아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인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온 구세주로 봤습니다. 학생 운동보다는 선교와 개인적 기도와 신앙 활동에 집중하는 편이었습니다.

졸업을 하고 나니까 사회에도 두 진영이 있더군요. 천주교는 주로 정의구현사제단이 그 역할을 합니다. 사회적ㆍ정치적 이슈에 대해 진보적인 목소리를 냅니다. 개신교에도 진보 진영이 있습니다.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NGO 단체들이 여러 이슈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내며 진보를 자처합니다.

예수 당시에도 이스라엘에는 좌파와 우파가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라 예수의 재판도 로마의 빌라도 총독이 맡았다.

예수 당시에도 이스라엘에는 좌파와 우파가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라 예수의 재판도 로마의 빌라도 총독이 맡았다.

이에 맞서는 보수 진영도 물론 있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입니다. 바깥 세상보다는 개인의 내면에 더 무게 중심을 두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군사 정권 하에서는 침묵만 지키거나, 오히려 정권에 동조했다며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반면 기독교 진보 진영은 보수 정권 하에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데, 진보 정권이 들어서면 침묵만 지킨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어느새 ‘정권의 2중대’로 전락했다”는 비판과 함께 말입니다.

진보와 보수, 두 진영에서 바라보는 예수는 다릅니다. 좌파에서는 예수의 왼쪽 얼굴만, 우파에서는 예수의 오른쪽 얼굴만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그게 예수의 전부야”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보는 것만 예수야, 당신이 보는 건 예수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저는 참 궁금합니다. 정작 예수는 어땠을까요. 예수는 “나는 왼쪽이야”라고 말한 적도 없고, “나는 오른쪽이야”라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 ‘좌파의 예수’라고 한 적도 없고, ‘우파의 예수’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시작이자 끝이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 “나는 가장 높은 자요, 가장 낮은 자다.” 저는 여기에 답이 있다고 봅니다.  ‘예수의 눈’이 위치한 장소가 바로 여기라고 봅니다.

동양 종교에서는 진리를 가리킬 때 한자로 ‘중(中)’자를 씁니다. 그런 진리를 유교에서는 ‘중용(中庸)’이라 부르고, 불교에서는 ‘중도(中道)’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교도 출발은 서양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태어난 이스라엘은 중동입니다. 영어로도 ‘중동(Middle East Asia)’은 아시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아시아에서 태동한 종교입니다.

서양에서는 이원론을 말하지만, 동양에서는 일원론을 말합니다. 이원론은 선과 악으로 세상을 쪼개지만, 일원론은 쪼개진 선과 악을 하나로 합합니다. 예수 역시 이원론을 설하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일원론을 말했습니다.

가령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경부선 철도가 있습니다. 여기서 중도(中道)는 어디쯤일까요? 사람들은 대부분 “대전이나 대전을 중심으로 한 그 일대”라고 답합니다.

아닙니다. 틀렸습니다. 그건 서울과 부산을 둘로 쪼개는 기계적인 중도입니다. 이분법적인 중도입니다. 예수의 일원론, 예수의 중(中)은 그런 중도가 아닙니다.

그럼 어디일까요? 서울이 출발역이고 부산이 종착역이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예수의 중(中), 예수의 눈은 어디쯤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예수의 중(中)은 경부선 철도 전체입니다. 다시 물어봅니다. 남과 북이 있습니다. 예수의 중(中)은 어디일까요? 맞습니다. 남한도 아니고 북한도 아닙니다. 답은 한반도 전체입니다.

예수의 가슴은 이처럼 넓습니다. 포용적입니다. 조화롭습니다. 전체를 생각하고, 전체를 살립니다. 저는 여기서 ‘예수의 눈’을 봅니다. 좌파나 우파에 함몰되지 않는, 거대한 그리스도의 눈을 봅니다.

우리 사회 그리스도교의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진영의 눈’을 허물고 ‘예수의 눈’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의 눈' 아니라 '예수의 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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