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예수뎐] 예수가 설한 행복의 비밀, 왜 슬픔일까

중앙일보

입력 2021.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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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갈릴리 호수 근처의 언덕에 있는 팔복교회 안은 고요했다. 제단의 십자가 앞에는 오래된 악보가 하나 펼쳐져 있었다. 중세 때 사용한 악보였다. 음표가 독특했다. 음표의 머리는 있는데 꼬리는 없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예수의 ‘산상수훈’에 음을 단 악보였다. ‘팔복(Beatitudes)’이 하나씩 시작될 때마다 라틴어로 대문자 ‘B’를 달아놓았다. 예수의 ‘산상수훈’은 그 자체가 노래였다. 우리의 고집을 허물고, 잘남을 허물고, 착각을 허물면서 잦아드는 음표들. 그 음표 안에 깃든 온유한 폭풍. 그게 ‘산상수훈’이다. 그래서 여덟 개의 ‘B’로 가득한 악보가 여덟 개의 ‘B’로 가득한 삶을 노래한다.

갈릴리 팔복교회 안에 펼쳐져 있던 악보. 산상수훈의 메시지에 음표를 달았다. 중세 때 사용하던 악보라 음표의 머리만 있고 꼬리는 없다.

갈릴리 팔복교회 안에 펼쳐져 있던 악보. 산상수훈의 메시지에 음표를 달았다. 중세 때 사용하던 악보라 음표의 머리만 있고 꼬리는 없다.

⑨예수가 설한 행복의 비밀

교회 안의 빈자리에 앉았다. 예닐곱 명의 순례객들이 띄엄띄엄 앉아 묵상을 하고 있었다. 가방에서 성서를 꺼냈다. 산상수훈을 펼쳤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5장 4절)

산상수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 마음을 노래한다. 하느님 나라를 가득 채우는 신의 속성을 노래한다. 그 속성이 우리에게 행복을 준다. 예수는 그 속에 깃드는 여덟 가지 방법을 일러준다.

인간은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제아무리 백만장자라 해도, 제아무리 절대 권력자라 해도 이를 피할 수는 없다. 막상 마주하면 감당하기 벅찬 일, 그것이 바로 ‘애(哀)’. 슬픔이다.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산상수훈을 선한 공간도 갈릴리 호수 근처다. 제임스 티소 작품.

갈릴리 호숫가에서 예수가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산상수훈을 선한 공간도 갈릴리 호수 근처다. 제임스 티소 작품.

예수는 달리 말한다. 슬퍼하는 사람들, ‘애’를 품은 사람들. 그들이 행복할 거라고 말한다. 왜 그럴까. 슬픔은 늘 ‘상실’을 전제로 한다. 무언가를 잃었을 때, 무언가를 놓쳤을 때, 누군가와 이별할 때 슬픔이 밀려온다. 그래서 슬픔의 바닥에는 상실의 강이 흐른다. 예수는 그런 ‘상실감’을 소중히 여겼다.

왜 그랬을까. 무언가를 잃어버릴 때 우리의 무릎이 꺾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릎이 꺾일 때 우리 안에 구멍이 뚫린다. 슬픔의 구멍, 상실의 구멍이다.

위로는 어디를 통해서 올까. 그 구멍을 통해서 온다. 신의 속성은 인간과 세상과 우주에 대한 ‘평형수’이다. 내가 무릎을 꿇을 때, 나의 고집이 무릎을 꿇을 때, 나의 에고가 무릎을 꿇을 때 뚫리는 구멍을 타고 ‘평형수’가 밀려온다. 그게 위로다. ‘하느님 나라’에서 밀려오는 근원적인 위로다.

자신의 무릎을 꺾은 이에게는 위로가 찾아온다. 에고를 빳빳이 세운 채 스스로 무릎을 꺾지 않은 이에게는 위로가 찾아가지 않는다. 그의 내면에 슬픔의 구멍, 상실의 구멍이 뚫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말하지 않았을까.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팔복교회 천장은 팔각형으로 돼 있었다. 산상수훈에 담긴 팔복을 형상화했다. 아래 사진은 팔복교회 안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외국인 순례객들이다.

팔복교회 천장은 팔각형으로 돼 있었다. 산상수훈에 담긴 팔복을 형상화했다. 아래 사진은 팔복교회 안에서 기도를 하고 있는 외국인 순례객들이다.

팔복교회 안으로 스페인에서 온 순례객들이 들어왔다. 스무 명쯤 되는 그들은 좁은 교회 안에 빙 둘러서서 노래를 불렀다. 교회 천장을 타고서 소리가 울렸다. 가사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느낄 수는 있었다. 숨 쉬며 울리는 그 음표들 속에서 ‘산상수훈’의 메시지를 묵상했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복음 5장 5절)

온유하지 않은 이들은 누구일까. 고집이 센 사람들이다. 이번에 예수는 ‘고집’을 겨냥한다. 고집이 뭘까. 내가 세운 ‘잣대의 성벽’이다. 사람들은 내 땅을 지키기 위해 성벽을 쌓는다. 그 성벽이 자신을 적으로부터 지켜줄 거라 믿는다. 그래서 아군에게는 성문을 열고, 적군에게는 성문을 닫는다. 그래야 내 땅이 지켜지니까.

‘예수의 눈’으로 보면 다르다. 그건 성벽이 아니라 ‘감옥’이다. 신의 속성은 이 우주에 가득하다. 이를 외면한 채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다. ‘산상수훈’의 메시지는 이처럼 역설적이고 파격적이고 혁명적이다.

나는 선문답 일화 하나가 떠올랐다. 8년간 멀리 수행의 길을 떠났던 젊은 수행자가 돌아왔다. 중국의 장경(章敬) 선사가 물었다. “그동안 자네는 무엇을 했는가?” 젊은 수행자는 대답 대신 꼬챙이를 하나 집어 들고 땅에다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장경 선사가 말했다. “그래, 그뿐인가. 다른 것은 또 없는가.” 그 말을 듣고 수행자는 발로 동그라미를 지워버렸다. 그리고 합장한 뒤 돌아서 가버렸다.

팔복교회 근처 갈릴리 산촌의 언덕. 예수는 몸소 걸어서 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유대 회당에서 설교를 하곤 했다.

팔복교회 근처 갈릴리 산촌의 언덕. 예수는 몸소 걸어서 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유대 회당에서 설교를 하곤 했다.

이 선문답 일화에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을까. 장경 선사가 물었다. “그동안 수행을 해서 무엇을 깨쳤는가.” 젊은 수행자는 동그라미를 그렸다. 깨달음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으니 딱히 건넬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동그라미를 그렸다. 제자의 공부가 미심쩍었던 장경 선사가 되물었다. “그것뿐인가.” 더 정확한 걸 보여달라는 말이었다.

이에 젊은 수행자는 동그라미를 지워버렸다. 왜 그랬을까. 바로 그 순간 ‘진짜 동그라미’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게 뭘까. 꽃이 피고, 새가 울고, 비가 내리는 이 세상이다. 이 우주다. 젊은 수행자는 ‘자신의 동그라미’를 지우면서 이 우주를 다 품는 ‘테두리 없는 동그라미’를 드러냈다. 나의 땅, 나의 고집, 나의 성벽을 허물 때 비로소 예수의 땅이 드러나듯이 말이다.

예수는 말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마태복음 5장 6절)

예수가 말한 의로움이란 뭘까. 언뜻 생각하면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 선교를 하다 목숨을 잃은 초대교회의 사도들, 지금도 오지로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선교사들. 그들이 바로 의로움에 주린 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예수가 말한 의로움은 약간 달랐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크고 위태로운 행위를 가리킨 건 아니었다.

팔복교회 안에는 산상수훈에 담긴 예수의 여덟 가지 행복을 형상화한 대목이 곳곳에 있었다.

팔복교회 안에는 산상수훈에 담긴 예수의 여덟 가지 행복을 형상화한 대목이 곳곳에 있었다.

‘의로움’은 히브리어로 ‘체다카(Tzedakah)’이다. ‘어떤 기준에 부합되다’라는 뜻이다. 예수는 무엇에 부합될 때 의롭다고 했을까. 또 무엇에 목마를 때 의롭다고 했을까. 물음이 올라왔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마음이 무엇에 부합될 때 진정한 행복감을 얻을까?’ 답은 하나였다. 산상수훈의 팔복을 관통하며 예수가 강조하는 단 한 가지. 다름 아닌 ‘신의 속성’이다. 그것과 부합될 때 비로소 우리는 흡족해진다. 다른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가 의로운 사람일까. 하느님의 마음, 신의 속성을 갈구하고 목말라하는 사람이다. 그에 부합하는 사람들, 예수는 그들을 향해 “의로운 사람들!”이라 불렀다. 그러니 거창하게 목숨을 걸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내 안의 고집을 하나 꺾을 때, 내 안의 집착을 하나 내려놓을 때 나는 ‘의로운 사람’이 된다. 예수는 그런 우리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마음에 주리고, 신의 속성에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함’을 얻을 것이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행복을 설하고 있다. 산상수훈은 주님의기도(주기도문)와 함께 성경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라 불린다.

예수가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행복을 설하고 있다. 산상수훈은 주님의기도(주기도문)와 함께 성경을 떠받치는 두 기둥이라 불린다.

팔복교회는 아름다웠다. 교회 안도 그렇고, 교회 바깥도 그랬다. 길가에 조그만 돌을 깎아 산상수훈의 팔복을 여기저기 새겨놓고 있었다. 산상수훈의 팔복은 한 마디로 길이다. 어떤 길일까. 우리의 마음이 하늘나라의 마음을 닮아가게 하는 구체적인 길이다.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가 던진 한 마디는 이랬다.

행복하여라!

〈10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고(故) 차동엽 신부와 예수의 산상수훈에 대해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차 신부님은 “성서에는 두 기둥이 있다. 하나는 주님의기도(주기도문)이고, 또 하나는 산상수훈이다”고 하더군요.

예수의 가르침 중에서 산상수훈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만큼 큽니다. 왜냐고요? 그 속에 아주 구체적인 길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에고를 중심으로 보고, 듣고, 판단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나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게 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나의 마음’을 ‘하느님 나라의 마음’으로 바꾸어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조목조목 지적하며 하느님 나라의 마음을 우리에게 설명해줍니다. 왜냐고요? 나의 마음이 하느님 나라의 마음을 닮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살게 될 테니까요.

그때 차 신부님에게 던졌던 짧은 질문이 생각납니다. 저는 ‘슬퍼하는 사람’을 물었고, 차 신부는 ‘희망’이라는 말로 답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슬퍼하는 사람들. 어떤 슬픔인가.
“마태오 복음에선 ‘펜툰테스(Penthoun-tes)’라고 썼다. 이건 상실의 슬픔이다. 사별 등 매우 소중한 걸 잃은 극심한 슬픔을 뜻한다. 루카 복음에선 ‘클라이온테스(Klaiontes)’란 말을 썼다. 그건 땅을 치면서 우는 걸 뜻한다.”
예수는 무슨 단어를 썼나.
“히브리어로는 ‘사파드(Sapad)’다. 애통해하면서 우는 걸 뜻한다. 예수님은 이 말을 썼을 것이다. 슬픔은 감정이고, 우는 건 표출이다. 사파드에는 이 두 의미가 통합돼 있다.”
이상하다. 슬퍼하는 사람이 왜 행복한가.
“맞다. 사람들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도대체 슬퍼하는 사람이 왜 행복할까. 그 답이 ‘위로’에 있다. 유대인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성서를 기록할 때 수동태를 많이 썼다. ‘하느님’이란 주어를 생략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 구절의 ‘위로’는 ‘하느님이 주시는 위로’가 된다.”
슬프다고 다 위로를 받는 건 아니지 않나.
“이런 말이 있다. ‘슬픔은 비와 같다. 장미꽃을 피울 수도 있고, 진흙탕을 만들 수도 있다.’ 결국 슬픔도 선택의 문제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헤리 로더라는 가수가 있었다. 그는 공연 중에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도 평소처럼 노래하며 공연을 마쳤다. 그리고 야전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아들의 시신을 붙들고 우는 대신, 그곳에 있던 군인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훗날 잡지사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의 죽음이 너무도 슬펐다. 그러나 하느님께 제 슬픔을 맡겼다. 그러자 놀라운 위로와 힘을 받았다. 나는 그걸 보여줬을 뿐이다.”
우리의 일상에 극심한 슬픔이 닥칠 때는 어찌해야 하나.
“슬픔과 절망을 겪지 않은 사람의 삶은 싱겁다. 그래서 누리는 행복도 싱겁다. 우리가 명심할 건 슬픔의 끝에 위로가 있다는 거다. 슬픔의 크기와 비례하는 위로가 말이다. 그걸 가슴 깊이 받아들이면 희망이 생겨난다. 고통이 와도, 슬픔이 와도 두렵지만은 않게 된다. 그 고통의 끝에 무엇이 있는 줄 아니까.”

“슬픔의 끝에 위로가 있다. 그걸 가슴 깊이 받아들이면 희망이 생겨난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내내 이 말이 생각났습니다.

백성호의 예수뎐, 지난 연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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