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상형문자를 조형언어로 재창조|미화랑의 김태정전·갤러리 블루의 페렌치 괴괴스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문자와 회화의 접목을 시도한 동·서양 두 화가의 작품전이 나란히 열려 좋은 대비를 이룬다. 8일부터 19일까지 미화랑에서 열리는 김태정전과 지난 2일부터 14일까지 갤러리블루에서 계속되는 헝가리화가 페렌치 괴괴스전-.
두 작가 모두 고대 상형문자에서 이미지를 얻어 이를 형상화함으로써 각기 독창적인 그림세계를 이뤄냈다. 의미를 전달하는 기호체계인 상형문자는 이들의 손을 거치면서 다시 새로운 조형·상징언어로 탄생했다.
그러나 이들은 발상과 출발만 비슷할 뿐 캔버스 위에 표현된 세계는 상당한 거리를 보인다.
김태정씨(52)의 작품은 마치 선사시대 암벽에 새겨진 선각화를 연상케 한다. 은은하고 유현한 바탕에 낙서처럼 자유분방하게 새겨진 선묘들은 우리를 태고의 자연으로 회귀시킨다는 평을 받고있다. 김씨는 본래 중견서예가다. 국전에서 8번이나 입선했을 만큼 서예에 경륜과 실력을 쌓았다.
그는 지난 79년 미국출장 중 여러 박물관·미술관을 돌아보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보고 큰 충격을 받으며 무릎을 쳤다.
가장 간단한 상형문자(기호)를 통해 한글과 한문을 모르는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찾아낸 것이다.
그는 이후 7년여 동안 미국의 시카고 예술연구소에서 현대미술과 문자학을, 대만의 중국예술대학원에서 고대문자를 연구하는 등 새로운 창작세계를 찾기 위해 방황했다.
결국 그가 찾아낸 것은 『자연의 모든 동세를 스스로 간략한 문자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이는 마치 어린이들의 신나는 낙서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서예를 떠난 지 8년만인 지난 87년 현대미술초대전에 첫 작품 『유간예인』을 발표, 화단을 놀라게 했다. 그의 독특한 표현방법과 예술성은 새로운 한국미의 탄생으로 평가받았다.
김씨는 『가장 순수한 상태로 자연의 동세를 낙서하듯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다』며 서화동원의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지난해 5월 첫 개인전 이후 그린 신작 30여점을 선보이는데 초기작품에 비해 좀더 회화적인 면이 강조됐다.
페렌치 괴괴스(53)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새롭게 구도화 한 후기모더니즘계열의 작가다.
그의 작품은 검고 굵은 선을 주조로 한 기하학적 구도로 자신의 정신세계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특히 강렬한 원색의 색채감으로 시각적인 효과를 강조한다. 지난 3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한 괴괴스는 57년 네덜란드로 망명해 아르넴국립미술학교를 나왔다. 63년 첫 개인전을 가진 이후 여러 세계아트페어에 참가해오고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수면 위의 파문이 결국 무형태로 소멸되듯 인간의 원초적 본질을 회복하자』고 말한다.
이는 마치 김씨가 『원초적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의 만남으로 그림을 낳는다』고 강조한 「자연회귀」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면모도 보이고 있다.
두 작가의 스케치수첩을 들여다 보면 매우 비슷한 형태의 새로운 상형문자가 실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과 같은 문자의 회화화는 우리나라에서는 고암 이응노 화백 등이, 서양에서는 스페인화가 호안미로가 캘리그라피운동을 통해 시도한바 있다.

<이창우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