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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승리라고? 전혀요" 중국 '드러누운 청년들'의 변명

중앙일보

입력

[사진출처=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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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성공한 미국인 사업가가 멕시코 해변에 누워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한 어부를 발견한다.
어부 역시 마찬가지로 유유자적하게 햇볕을 쬐고 있었다.
사업가는 어부에게 조언했다.
쉴 시간에 고기를 더 많이 잡아 큰 배를 사고,
사람을 고용해 회사를 차리면 평생 일을 안 해도
자신처럼 느긋하게 여생을 즐길 수 있다고.
성공한 사업가의 명쾌한 인생 로드맵을 다 듣고는
어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눈빛을 반짝이며 딱 한마디를 던졌다.
“지금 내가 딱 그렇게 사는 것 같은데요?”

언젠가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남미 우화다. 이후 사업가가 어떻게 반박했을지 궁금해지지만 이야기는 어부의 마지막 말로 끝을 맺는다. 왠지 당당한 어부의 대답에 말문이 막혔을 사업가의 모습이 상상이 되는 대목이다.

중국 신조어 '탕핑(躺平)'은 무슨 뜻?

최근 중국에서 유행처럼 떠도는 말인 '탕핑족(드러누운 청년들)'은 위 우화 속 어부처럼 안빈낙도, 안분지족의 삶의 자세를 견지하는 중국 젊은 세대를 지칭하는 단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한 노력보다 적은 물질적 자원으로 최대한의 정신적 자유를 누리겠다는 것이 곧 탕핑족의 사상이자 '철학'이다.

탕핑족의 시초가 된 글. 필자는 "드러눕는 것이 곧 정의"라며, 2년간 일하지 않고 최소한의 돈으로 침대 위에서 누워 지내는 자신의 '탕핑하는 삶'에 대해 소개했다. [사진출처=웨이보 캡처]

탕핑족의 시초가 된 글. 필자는 "드러눕는 것이 곧 정의"라며, 2년간 일하지 않고 최소한의 돈으로 침대 위에서 누워 지내는 자신의 '탕핑하는 삶'에 대해 소개했다. [사진출처=웨이보 캡처]

사실 엄밀히 말해 우화 속 어부와 중국의 탕핑족은 같지 않다. 전자는 자신의선택으로안빈낙도적 삶을 택했지만, 후자는 경쟁이 심화된 현실 속에서 '낙오됐다는' 의미가 강하게 드러난다.

삶이나 세상을 보는 세계관도 다르다. ‘탕핑’이라는 단어엔 조금 더 무기력함, 자조, 그리고 반항의 색채가 묻어난다. '탕핑(드러눕다)'은 노동을 통해 일정 수준 이상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어려운 현시대 젊은이들의 불복종 운동이다.

[사진출처=웨이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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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핑족을 향한 우려의 시선들

당연하게도 우려의 시선들이 이들에게 쏟아진다. 중국 관영 매체들은탕핑족의 삶의 자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논조의 기사들을 내놓고,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유행이 사회적으로 미칠 영향을 이야기한다. SNS에서는 탕핑을 옹호하는 내용의 글이나 댓글이 실시간 검열되고 있다. "탕핑은 사회적 병폐"라는 시각이 사회적으로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자신이 ‘능동적인 탕핑의 삶'을 선택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웨이보에서 자체 검열된 탕핑을 옹호하는 댓글들 [사진출처=웨이보 캡처]

웨이보에서 자체 검열된 탕핑을 옹호하는 댓글들 [사진출처=웨이보 캡처]

이들은 ‘땀 흘려 일하고, 노력하는 진취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기존 통념에는 여전히 반대한다. 노력해도 큰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어려운 시대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자조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특기를 이용해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소박하지만 본인에게 맞는 라이프스타일을 구축하는 데 힘쓴다. 이들은 주로 프리랜서 형태로 생활을 영위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를 '탕핑족'이라 밝힌 랴오닝(遼寧)성 안산(鞍山)시의 한 청년은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미니멀 라이프를 영위하는 본인의 삶을 소개했다. [사진출처=신화통신]

스스로를 '탕핑족'이라 밝힌 랴오닝(遼寧)성 안산(鞍山)시의 한 청년은 프리랜서로 활동하며 미니멀 라이프를 영위하는 본인의 삶을 소개했다. [사진출처=신화통신]

능동적으로 '탕핑'을 택한 젊은이들

신화통신에서 인터뷰한 한 청년은 자신을 ‘탕핑족’이라고 선언하며 출퇴근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사는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소개했다. 그는 일이 많을 때는 바쁘게, 일이 적을 때는 한가롭게 하루를 보낸다. 2019년 대학 졸업 후 번역과 기타 강습을 통해 매주 약 1천위안을 벌며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그는 "제 목표는 행복하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라며 "저 자신을 지치게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고 싶지도 않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능동적 탕핑족'들은 과도한 경쟁 속에 본인을 갈아 넣기보다 주어진 삶을 최대한 행복하게, 누구보다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택한다. ‘남들만큼’, 혹은 ‘남들보다 많이’ 갖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것을 꼭 추구하지도 않는다.

장시(江西)성 징더(景德)진에 있는 자신의 공방에서 일하며 '비정규직의 자유로운 삶'을 사는 한 청년 [사진출처=신화통신]

장시(江西)성 징더(景德)진에 있는 자신의 공방에서 일하며 '비정규직의 자유로운 삶'을 사는 한 청년 [사진출처=신화통신]

이들은 자신들이 과거 세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학창 시절을 보내고, 직업 선택에서도 다양한 기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여행이나 어학연수로 견문을 넓힐 기회를 가져봤고, 졸업 후 취업 대신 새로운 기회와 선택지들도 있다.

꼭 직장에 가지 않더라도 이들은 충분히 경제생활을 할 수 있기도 하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어려웠던 일이다. 영상을 만들거나, 화장품 리뷰를 하면서도 돈을 벌 수 있는 세상에서 이들은 이러한 새로운 기회를 이용해 스스로 만족도 높은 인생을 만들어 나간다.

[사진출처=셔터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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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량(馬亮) 중국인민대 공공관리대학 교수는 "일부 젊은이들은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채 누워만 있다고 생각한다"면서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에게 맞는 독립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찾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탕핑족들의 마음속 저울은 내일의 부동산, 자동차, 결혼이나 번듯한 직장 같은 것들보다 오늘의 소소한 행복을 택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다. 사회에서 바람직하게 여기는 것들을 이룰 수 없거나,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큰 희생을 해야 한다면 굳이 이를 쫓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신 이들은 스스로 가질 수 있는 것들에 만족하며, 주어진 새로운 기회들을 활용하며 살아가는 삶을  택하는 모습을 보인다.

차이나랩 허재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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