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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원의 이코노믹스

논 대신 공장에 물 대고 고속철 연결해준 대만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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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TSMC의 최종병기

김동원 전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

김동원 전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

지난해 4월 코로나 팬데믹이 유럽을 덮쳤을 때, 대만은 유럽연합(EU)에 700만장의 마스크를 보냈다. 그러나 독일 총리실 대변인은 감사 인사에 ‘Taiwan’이란 호칭조차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 독일 정부가 자동차 반도체 부족 문제가 심각해지자 올해 1월 대만 정부에 ‘정중하게’ TSMC에 자동차 반도체 공급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최근 미국 상무부는 연일 TSMC에 자동차 반도체 증산을 독려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자동차 반도체 부족 사태를 계기로 대만은 반도체 패권 국가로 등장했으며, 대만의 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TSMC는 일약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

시스템반도체 설계기업 급증하며 #파운드리 기술 앞선 TSMC 급부상 #5나노에서 TSMC에 뒤진 삼성전자 #차세대 공법으로 3나노 역전 시도

세계 반도체 패권은 1970년대 중반 종주국인 미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갔으며, 일본은 1990년대부터 쇠락해 2020년에는 세계 상위 10대 사에서 일본 기업의 이름이 사라졌다. 한편 미국은 시스템 반도체 개발에 주력해 2020년 세계 점유율 35.7%로 반도체 패권을 지키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반도체 패권을 결정하는가?

현재 세계 반도체 산업에는 세 가지 중요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첫째, 미국·중국·유럽·일본 등의 기술 국가주의(techno nationalism) 경쟁이다. 둘째,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이 표준 소품종을 대량 생산하는 종합반도체 업체(IDM)에서 스마트 폰을 비롯한 전자기기용 반도체를 설계하는 기업들과 시스템 반도체 설계기업으로의 이동이다. 그 결과 이들이 요구하는 다양한 종류의 비모메리 반도체를 생산해낼 수 있는 반도체 위탁제조 기업(foundry)의 생산역량이 중요해졌다. 셋째, 반도체 제조기술은 지난 60년간 반도체 산업을 이끌어 왔던 ‘무어의 법칙(반도체의 성능이 2년마다 2배로 증가)’이 끝나고 차세대 공법으로 전환하고 있다.

신냉전의 핵심은 반도체

김동원의 이코노믹스 그래픽=신용호

김동원의 이코노믹스 그래픽=신용호

세계 반도체 생산에서 미국의 비중은 1990년대 35%에서 2020년 12%로 감소했다. 그러나 핵심 지식재산권의 74%, 시스템 반도체 설계의 67%, 반도체 제조 장비 시장의 41%를 차지하고 있는 반도체 패권국이다. 그런데도 바이든 정부가 반도체 산업의 육성에 나선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반도체로 신냉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다.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 미·소 냉전은 이념적·군사적 대립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반면에 현재의 미·중 신냉전은 경제 패권을 다투고 있다. 실질구매력으로 평가한 경제 규모로는 중국은 이미 2018년부터 미국을 능가했고, 명목 환율로는 2030년경 중국이 미국을 추월해 ‘G1’이 될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미국은 경제 규모 대신에 첨단기술 주도권을 확보함으로써 경제패권의 지도력을 유지하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특히 반도체 산업 육성과 중국에 대한 수출 금지는 이 전략의 핵심이 되고 있다.

둘째, 바이든 정부는 지정학적 위험을 주목해 반도체 자급을 서두르고 있다. 반도체 부족이 초래한 미국 자동차 산업의 감산은 반도체 공급사슬의 지정학적 위험을 부각했다. 대만 해협을 둘러싸고 지정학적 위험이 고조되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에 세계 반도체 생산의 78%가 집중돼 있다는 사실은 미국 경제에 큰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바이든 정부는 두 차례의 백악관 회의를 통해 지난달 삼성전자와 TSMC로부터 미국에 최첨단 반도체 공장 건설 계획을 끌어냈다. 대만의 TSMC는 지난달 미 애리조나 주에 120억 달러를 투입해 첨단 5나노 반도체 생산공장을 2024년 가동목표로 건설에 착수했다. 향후 10~15년간 1000억 달러를 투입해 공장 6개를 미국에 건설할 계획을 밝혔다. 한편 인텔은 200억 달러를 투자해 공장 2개를 건설할 예정이며, 삼성전자를 포함해 10개 내외의 반도체 공장이 미국에 건설될 예정이다.

반도체 산업 분야별 시장 점유율 순위

반도체 산업 분야별 시장 점유율 순위

지난해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15.9%)은 ‘중국제조 2025’의 목표 40%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외국 기업들의 생산 비중이 10%를 차지하고 있어 중국 기업에 의한 생산 비중은 5.9%에 불과하다. 중국의 반도체 산업은 현재 삼중고에 직면해 있다. 우선 지난해 9월 미국 정부가 중국 반도체 기업 SMIC를 수출금지 대상에 포함함으로써 반도체 제조 장비의 조달이 차단됐다. 그간 중국 정부는 반도체 관련 기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했다. 지방정부 역시 대규모 투자를 추진했으나, 중국 반도체 산업은 기술개발 부진과 막대한 투자 손실로 심각한 부실화 위기를 맞고 있다.

반도체산업 조사기업 IC 인사이트는 2025년까지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외국 기업체 생산을 포함해 19.4%에 그치고, 그중 외국업체 비중은 여전히 50%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한마디로 중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반도체 굴기 정책은 난관에 직면해 있다.

반도체 부족 장기화할 듯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기술 국가주의 경쟁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산업 내부 사정은 녹록하지 않다. 우선 당면한 반도체 부족 문제는 장기화하리라는 것이 지배적인 전망이다. 자동차 반도체 부족 문제는 6월을 고비로 호전될 것이나 전반적인 반도체 부족사태는 2023년까지 계속될 전망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디지털 전환이 가속함으로써 반도체 수요가 급증했지만, 기업들이 신규 투자를 기피하는 저(低)기술 반도체의 공급 부족이 현저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반도체 제조공장을 건설하고 제품을 양산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최소 4년이 걸린다. 반도체 산업은 공급사슬이 복잡하고 전문적으로 분업화돼 있어 어떤 충격이 가해지면, 반도체 수급의 균형상태를 회복하는 조정 기간이 오래 걸리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편 지난 60년간 반도체 산업을 이끌어 왔던 ‘무어의 법칙’이 7나노에서 끝남에 따라, 삼성전자와 TSMC는 차세대 기술 경쟁을 하고 있다. 5나노에서는 TSMC가 앞섰지만, 삼성전자는 차세대 공법으로 3나노(nm, 10억분의 1m)에서 추월을 시도하고 있다. 5나노 이하의 초미세 공정에는 대당 가격이 2000억 원이 넘는 극자외선 노광장비(EUV)의 사용이 필수적이다. 이에 따라 공장 건설비용이 20조원을 초과하며, 양산기준을 충족하는 완제품 수율 확보는 더욱 어렵다. 따라서 반도체 산업은 더욱 고투자·고위험·고수익의 과점구조로 가는 것이 불가피하다.

기술인력 이동 위해 인프라 건설한 대만

세계 반도체 패권은 ‘연구개발과 장비’, ‘제조’로 양분돼 있다. 전자는 미국이, 후자는 한국·대만이 주도한다. 삼성전자와 TSMC의 제조기술을 기준으로 할 때, 중국은 3년 이상 격차가 있으며, 미국의 인텔도 2년 이상 격차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 격차를 뒤로 두고 TSMC와 삼성전자는 초미세공정에 천문학적 투자로 경쟁하고 있다. 결국 반도체 패권을 결정하는 것은 적기의 투자 및 제조 역량, 이를 뒷받침하는 양질의 인력과 산업생태계, 정부의 지원이다.

TSMC의 창업자 모리스 창은 지난 4월 공개 강연에서 삼성전자는 ‘두려운 경쟁상대’를 넘어 ‘강력한 경쟁 상대’로 TSMC를 쫓아오고 있다고 밝혔다. 2021년 1분기 현재 세계 반도체업체 상위 15개사 매출은 인텔 18.3%, 삼성전자 16.8%, TSMC 12.7%였다. 파운드리 산업에서는 TSMC 54%, 삼성전자 18%였다.

모리스 창의 언급에서 주목되는 점이 있다. 삼성전자를 경쟁자로 꼽은 이유로 최선을 다하는 직원들의 자세 등 인적 요소를 들었고, TSMC의 성공 요인으로 대만 정부와 사회 전반의 지지를 들었다. 특히 대만 정부는 기술 인력이 당일로 원거리 이동이 가능하도록 고속철과 고속도로를 건설해주는 등 반도체 산업을 적극 지원했다. 가뭄이 극심하자 논에 물을 끊고 반도체 공장에 물을 댄다. 요컨대 대만 정부의 전폭적 지원이 TSMC의 최종병기라는 얘기다.

한편 삼성전자는 정부와 사회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았는가? 평택 공장 송전선 문제를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는 데 5년을 소비했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용수 확보에 1년을 넘게 소비했다. 기업의 사활을 걸어야 하는 고위험의 대규모 투자 결정 앞에서도 최고 결정권자의 공백과 재판 등 사법 리스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동원 전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