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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우리는 이해하려고 듣지 않고 말하려고 듣는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63)  

석가탄신일, 아이는 학원에 갔고 남편과 둘이 느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상도 무르지 않은 채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정색하며 말을 이어갔다. “지난번에도 했던 이야기잖아. 자꾸 반복해 말한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언제까지 계속할 거야.” “나도 알아. 그냥 들어달라고 하는 말인데, 왜 그래?” 더이상 우리 둘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고,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밥상을 치운 후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나는 컴퓨터 모니터를 켰고, 남편은 책을 펼쳤던 것 같다. 집안 공기가 팽팽해졌다.

방법을 찾아 달라는 것도 아니었고, 함께 답을 고민해 보자는 것도 아니었는데. 마음속에 담아둔 것을 끄집어내고 싶었을 뿐인데. 하긴 요즘 비슷한 이야기를 몇 번 반복했던 것 같기는 하다. 들어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그게 남편이었으면 했을 것이다. 속을 드러내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왜 그런 마음이 생겼는지 자연스레 정리할 수 있고, 운이 좋을 때는 그래서 이후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계획이 세워지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속내를 털어놓을 상대가 많지 않다. 나이가 들수록 더 그렇다.

대화의 기본은 듣는 것.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돌아보면 그렇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사진 Cody Engel on unsplash]

대화의 기본은 듣는 것.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돌아보면 그렇지 못하는 나를 발견한다. [사진 Cody Engel on unsplash]

며칠 전 친구와 나눈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날 친구는 상사와의 소통이 어렵다며 말을 꺼냈다. “같은 팀 입장에서 내 앞에 벌어진 일에 대해 공감을 해 주길 바라면서 말을 하면, 돌아오는 건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냐는 반응뿐이야.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만 집중하는 거지. 그가 아는 방법을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나도 그렇게 해야 할 예정이었는데 말이야. 이해를 구하고 기운을 얻고 싶어 이야기를 꺼내는 건데, 더이상 그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똑같은 말을 들었다. 친구와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다며 속상해하는 딸에게 연신 ‘그럴 때는 이렇게 해 봐라’, ‘그 애는 이런 이유로 그랬을 거다’라며 현재 상황을 정리하는 팁과 방법을 전했다. “엄마는 왜 그래? 내가 답을 달라는 게 아니잖아. 그냥 들어달라는 거라고.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딸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차’ 했다. 경청이 먼저인데, 그걸 또 잊었구나.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건다면, 그에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 [사진 Jeremy Yyap on unsplash]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건다면, 그에게 시간을 주어야 한다. [사진 Jeremy Yyap on unsplash]

공감하며 듣기, ‘경청’의 중요성은 대화와 말하기를 다루는 모든 책에 들어가 있는 덕목이다. ‘토크쇼의 제왕’ 인 세계적 앵커 래리 킹은 낯선 사람도 두렵지 않은 소통의 방법으로 ‘대화의 90%는 경청’이라고 말한다. 경영학의 그루 피터 드러커는 경청을 실천하는 리더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말하지 말고 질문하라’는 주문을 한다.

리더는 경청을 통해 수용하고, 합의를 이끌어내고, 차이를 인정하고, 공통의 개념과 공통의 언어, 공통의 장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인은 매번 쓴소리를 경청하겠다고 말하고, 대기업의 총수도 소통을 위한 경청 리더십을 앞세운다. 목적과 프레임이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관계에서도 경청이 이렇게 중요한데, 지지하고 의지하는 가족관계, 친구와의 관계에서야 말해 무엇하랴.

대화의 달인으로 강의를 하고 있는 미국의 유명 방송인 셀레스트 헤들리는 TED 영상에서 경청한다는 건 주의를 집중해 몰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진짜 좋은 대화를 하게 되면 몰입이 되고, 영감을 얻으며, 진짜로 통했다고 느낄 수 있고,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되죠.” TED를 통해 그녀가 전한 10가지 대화법 중 몇 가지 뜨끔한 조언이 있었다. “설교하지 마세요. 자기 의견만 표현하고 싶고 반응하고 논쟁하고 반박하고 싶다면 블로그를 하세요. 항상 배울 것이 있다는 자세로 대화하세요. 상대방이 자신의 말을 잘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누구든 마음을 더 열게 됩니다.” 항상 답을 찾아 주는 게 우선이라 생각했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좋은 대화 상대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사진 Korney Violin on unsplash]

좋은 대화 상대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사진 Korney Violin on unsplash]

그 외에도 그녀의 조언을 들으며 반성하게 되는 포인트가 많았다. ‘대화의 흐름을 따라야’ 하는 데 그러지 못했고(이야기를 듣고 있던 참이라도 궁금한 점이 있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는 바로 말을 끊고 내가 말을 하려고 시도했다), ‘자신의 경험을 다른 이의 경험에 연결하지’ 말아야 하는 데 늘 그래왔다(나의 지난 시간을 예로 들며 진지하게 조언을 하고는 했었다). 모든 이의 경험은 다 다른데 말이다.

‘했던 말을 또 하지 말아야’ 하는데, 말하고 싶은 요점이 정리됐다 싶으면 계속 이야기하며 강조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대화에서 ‘듣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녀가 예로 든 스티븐 코비의 말 ‘우리는 이해하려고 듣지 않고 말하려고 듣는다’처럼 말이다. 내가 움직이고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런 자세로 끼어들고 조언을 앞세워 하고 싶은 말을 전하고는 했다.

책을 뒤적이던 남편이 산책을 나서려 일어섰다. “나도 같이 가. 잠깐 기다려.” 그래, 서운할 일이 아니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으니 말이다. 주의하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함께 걸으며 서두르지 말고 다시 이야기를 꺼내 봐야겠다.

전 코스모폴리탄·우먼센스 편집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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